[작가 김주영의 그림 읽기]잠 속에서도 시간은 살아 움직입니다

  • 입력 2007년 11월 10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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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눈을 떼지 않는 이 상자에는 송진처럼 밀도 있게 압축된 시간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의 상자라고 이름 짓습니다. 가없는 우주의 한쪽 끝에서, 혹은 머나먼 곳에 있는 미지의 대륙으로부터 이 시간의 상자는 억겁이 흘러갈 동안 이 넓은 바다를 홀로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바닷가로 밀려났습니다.

알고 보면 이 떠돌이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시간은 무한대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상자는 생겨난 이후 단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습니다. 상자를 열 수 있는 능력이나 기량을 가진 사람이 없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레 겁먹고 포기해 버린 탓입니다. 혹은 이미 늦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말은 모두 변명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올라갈 수 없는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런 속담이 보편화되면서 패배주의가 창궐하고, 스스로를 포박하여 구속하며, 혹은 비웃게 된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철통같이 무장된 이 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진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쩐 셈인지 애초부터 단념하고, 무작정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곧잘 좌절하여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하며,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의 계단이 너무 가파르다고 넋두리하며 울부짖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행태라 할 만합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렸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순식간에 처분하고 후딱 결정하며 재빨리 결과를 얻어 내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하루를 24등분으로 잘라 두고 그 속에 우리 자신을 가두어 두었으므로 겪는 재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24시간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을 질서정연하게 구획 짓는 매우 편리한 사회적 결정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분류나 질서가 있다 해서 시간이 가지는 본질이 분해되거나 변질되지는 않습니다. 내 스스로 독특한 관리 시스템을 갖고 운용의 묘를 살릴 수 있는 기량과 여유만 가진다면 그는 시간을 정복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가 되겠지요. 그래서 해가 떠서 다시 해가 떠오를 때까지 24시간밖에 없다는 시간을 48시간이나 소유할 수 있을 것이고 72시간을 가질 수 있는 사람도 생겨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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