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지평선]생명의 봄, 지상과 천상의 삶 공유…

  • 입력 2008년 4월 8일 02시 53분


생명이 뻗어 나가는 모습을 추상적으로 형상화한 그림. 고은 시인이 직접 그렸다. 생명이 개막하는 계절인 봄에 고은 시인은 거대한 우주의 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성찰한다.
생명이 뻗어 나가는 모습을 추상적으로 형상화한 그림. 고은 시인이 직접 그렸다. 생명이 개막하는 계절인 봄에 고은 시인은 거대한 우주의 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성찰한다.
생명은 주어인가.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생명은 술어일 것이다.

생명은 주체이기보다 행위이다. 행위의 능력이다.

지난겨울은 생명의 휴식이고 이 봄은 생명의 개막이다. 여름은 생명이란 생명은 다 드러나는 운동으로 찬다. 생명 만원이다.

가을은 그 생명의 종언과 결실을 낳고 겨울의 깊이에 가라앉는다. 그래서 가을은 슬픈 가을이라 하고 겨울은 깊은 겨울이다.

아직 이런 네 계절이 이 북위 30도, 40도 사이의 온대지역에서 어김없이 진행되고 있는 사실은 자연의 율동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이런 행복이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찾아올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것은 자연생태에 가한 인간의 이익 추구에 의해서 초래되는 재앙만이 아니라 인간과 문명의 작용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자연과 우주 자체의 행위의 무위에 의한 거역할 수 없는 자연 상황의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아니, 지금껏 인간이 누려온 자연의 혜택 자체가 이전의 자연에는 없던 현상에 지나지 않다.

하늘의 도 무심(天道無心·천도무심)함이란 자연이 결코 인간을 위해서 존속되지 않는 냉엄한 무상(無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유구한 무상이야말로 영원한 술어인 것이다.

봄밤.

어떤 그리움. 그러나 그리움이란 외로움의 바깥이 아닐까. 그리움은 외로움에 의해서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경우 이런 외로움을 그리움이라고 들씌우는 것일까. 이런 경우 그리움은 외로움의 부산물로 규정하기 십상이다.

그리움에의 굴욕적인 정의를 막기 위해서 그리움을 외로움의 하위에 놓을 수 없어야겠다. 그리움은 외로움이 아니라 그리움 그 자체로서 정당화되어야겠다.

하지만 이 같은 강조의 한편에서 이타(利他)는 이기(利己)의 이자(利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차라리 모든 가치를 지향할 때의 자기 자신의 욕망을 수긍하는 일도 솔직하지 않은가.

봄밤. 다도해.

마치 내면이 외부와 바뀌어버린 듯한 그 낯선 바다의 비린내 풍기는 육감의 어둠.

무려 50년 전 그대로 그 어둠은 나에게 젊고 풍요하다.

바다의 어둠 쪽에서 하늘의 어둠 쪽으로 고개를 든다.

여름의 밤하늘이나 가을밤의 그 인내 가득한 청정의 하늘이 아니더라도 모유(母乳)의 습기를 머금은 봄밤에도 하늘은 하나의 가능성으로서의 무한을 잉태하고 있다.

언젠가 페르시아 늙은 시인 오마르 하이얌이 어린이처럼 천문대를 지어 하늘의 별들을 보는 꿈이 간절했다. 나 또한 하늘 속을 비상하는 물체가 되기를 아직도 꿈꾸고 있다.

유리 가가린이 우주선을 타고 궤도 진입에 성공했을 때 그가 떠나온 지구라는 우주 속의 구슬을 보았을 때 한 말이 있다.

‘지구는 푸르다.’

이런 말에 얼마나 반했던가.

이제 생각하니 그 말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어느 나라의 속담 ‘진리는 푸르다’에의 공감으로 연결되는 느낌이다.

두 개의 말에서 ‘푸르다’는 무척 생명적이다. 그것은 우주는 장엄하다든가, 지구는 아름답다든가, 새삼 우주 궤도를 돌며 신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든가 따위의 속어보다 얼마나 ‘푸른가!’

물론 이 남도의 다도해 봄밤의 바다에서 내가 누리는 우주에의 어떤 촉감은 분명 지상의 것이지만 동시에 천상의 것이기도 하다.

태양계의 한 행성 역시 우주 속의 자기 궤도를 공전하고 자전하는 우주 사업의 일환 아닌가.

그렇다면 이 지상에서의 삶 전체가 이미 우주적인 삶 또는 천상의 삶이 아니겠는가.

우주의 특징은 한마디로 공백에 있다.

우주 안의 온갖 별나라라 하더라도 그것들은 기껏해야 우주 공백의 0.5%밖에 차지하지 않고 있다 한다.

어디 이뿐인가.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우주는 우주 전체의 고작 4%밖에 되지 않는다 한다.

무한은 무한 더하기 1인가, 무한 더하기 1 더하기 1 더하기… 인가.

아니라면 무한에는 무한의 한 부분이 그 전체와 같은가. 무한을 2배 5배 1000배로 해도 똑같은 무한이 아닌가.

유한의 생물인 사람의 수작으로 어떻게 우주무한의 그 무궁(無窮)을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결국 나는 이 무한으로서의 우주 공백 앞에서 낙망하고 말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람의 육안으로 보는 별은 3000개가 가장 많다 한다. 10년 전 히말라야에 올라갔을 때 그곳의 6500m 지대에서는 별 8000개를 셀 수 있다 했다.

과연 그곳에서의 별들은 우주의 과일 같았다.

그런데 우주는 이런 별나라 따위의 광활한 세계도 지극히 미미한 것으로 여기는 텅 빈 곳이다. 물질 4%에다 그 나머지 74%는 암흑에너지이고 22%는 암흑물질이라 한다.

이 암흑물질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정체불명이며 어떤 반응도 일으키지 않은 상태라 한다. 그럼에도 지구의 땅속은 물론이고 인체도 자취 없이 투과한다고 한다.

최근의 우주물리학은 26억 광년이나 떨어진 초은하단(超銀河團)에서도 그런 암흑물질의 어떤 낌새를 포착했다 한다.

이런 우주의 무한공백 이쪽 아주 작은 ‘푸른 별’ 위에서의 나는 우주의 사투리로 노래 부르고 우주의 넋으로 사는 동안 이 지상과 천상을 일생 동안 공유하는 것이다.

이 미물아 미생물아 너야말로 우주의 적자(嫡子)이다.

고은 시인·서울대 초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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