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의 만화방]日괴담집 ‘제괴지이’

  • 입력 2008년 4월 5일 02시 55분


일본 만화가 모호로시 다이지로의 괴담 만화집 ‘제괴지이(諸怪志異)’ 한국어판이 발매됐다. 짧은 괴담과 중장편 분량의 퇴마극을 포함해 4권 38편으로 새롭게 편집된 애장본이다. 1987년 일본의 만화잡지 ‘액션’에 첫 연재를 시작했으며 옴니버스 형식으로 최근까지 새로운 이야기가 발표되고 있다.

‘제괴지이’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괴담문학의 대표작인 ‘요재지이(聊齋志異)’를 알아야 한다. 이 괴담집은 ‘삼국지연의’ ‘서유기’ ‘홍루몽’ 등과 함께 중국 팔대기서 중 한 편. 저자 포송령이 평생 수집한 494편의 괴담을 엮은 것인데 18세기 중엽에 발표됐다. 우리 식으로 보자면 TV시리즈 ‘전설의 고향’쯤 된다. 신선 요괴 선녀 여우 정령 등 초자연적인 존재나 현상과 인간 간의 얽히고설킨 이야기가 주 테마다. 장궈룽(張國榮)과 왕쭈셴(王祖賢)이 출연했던 홍콩영화 ‘천녀유혼’을 비롯해 수많은 드라마, 소설, 만화가 이 괴담집을 토대로 창작됐다.

만화 ‘제괴지이’도 이 괴담집이 모델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아니라 창작 과정이 모델이다. 청나라 사람 포송령은 술집 작부나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모았다. 반면 현대의 만화가 모호로시에게는 그런 친구가 없었다. 그 대신 방대한 분량의 중국 고전과 괴이한 이야기 모음집인 지괴(志怪·4, 5세기경에 일어난 괴이한 이야기)가 있었다. 작가는 이 원천 콘텐츠에 매달렸다. 그렇게 찾아낸 괴담의 요소들을 재구성해 송나라를 배경으로 새로운 괴담을 꾸며냈다. 가령 1권에 실린 눈 없는 돼지에 대한 이야기인 ‘견토’ 편은 순수 창작이고 ‘계낭’ 편은 4세기경 편찬된 ‘수신기(搜神記)’에 등장하는 요괴 이야기를 재해석한 것이다.

작가의 이 같은 작업방식은 만화계에 적잖은 일화를 만들었다. ‘데즈카 오사무 만화상’을 수상할 때는 신인답지 않은 작품의 완성도로 인해 표절작으로 의심을 받았다. 또 데즈카 오사무는 생전에 다른 작가의 그림은 다 따라 그리겠는데 ‘모호로시의 그림만큼은 따라 그릴 수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기괴한 상상력으로 연출된 장면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매력이자 저력이 담겨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지식인은 ‘괴이 폭력 난동 귀신(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논하지 말아야 한다고 훈계했다. 그 정도로 괴담은 높은 흡입력과 대중적 파급력을 지닌다. 그 때문에 괴담은 정치사회적 혼란기에 등장해 민심을 통합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고 고단한 삶을 위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모호로시가 찾아낸 중국 식 괴담을 지금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괴담에는 이 세계와 저 세계가 상생하기 위한 교훈과 지혜가 담겨 있다. 이념과 가치가 다른 이들이 하나의 대륙에 모여 살아야 하는 이유가 담겨 있다.

박석환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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