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별]뮤지컬 연출가 추민주의 ‘박완서 선생님’

  • 입력 2007년 12월 15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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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끝 19살 꼭 잡아주던 글… 그해 겨울은 참 따뜻했네

《열아홉. 그때 나는 세상이 참 시시했다. 시시한 공부만 죽어라 해놓고 그 시시한 공부로 인생이 판가름 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시시해서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원하는 만큼의 점수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갈 수 있는 대학도, 선택할 수 있는 전공의 폭도 몹시 좁았다. 꿈꿀 권리란 처음부터 없었다는 생각에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

나는 그저 부모가 원하는 대로, 혹은 남이 보기에 그럴듯한 국립대학교의 커트라인에 맞추어 원서를 써서 제출하러 갔었다. 그날은 내가 지원한 대학의 지원 마지막 날이었는데 그 광경은 참혹했다. 원서를 내는 곳에는 벗겨진 구두와 남이 밟고 지나간 안경, 장갑, 목도리, 원서 봉투 같은 것들이 떨어져서 뒹굴고 있었고 내가 좋아했던 국사 선생님은 그 당시 몹시 귀했던 휴대전화를 들고 높은 곳에 서서 눈치작전을 수행하고 계셨다.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엄마에게 사정하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자고, 도저히 원서를 못 내겠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좌석버스 안에서 나는 엄마 무릎에 얼굴을 묻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아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잠이 들 때쯤 집에 도착했다.

다른 대학의 원서를 쓰기까지 이틀 정도 시간이 있었던 것 같다. 원서를 못 내고 돌아왔다고 고3 담임선생님과 주임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다시 대학 원서를 사러 서점에 갔다. 원서들을 훑어보다가 소설책이 있는 곳에 눈이 갔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독서 토론반 활동을 했는데 보통 문학 전집에 있는 외국 소설이나 문고판에 있는 1930년대 한국 소설 정도를 읽어 왔다. 왜 그랬을까? 그날따라 나는 서점의 책장 맨 위에서 두 번째 칸에 꽂아 둔 한국 소설에 눈이 갔다. 책 두 권을 꺼내어 들었다.

박완서. ‘그 가을의 사흘 동안’과 ‘엄마의 말뚝 외’.

그때 내가 선뜻 그 두 권의 책을 산 까닭은 이러하다. 작가의 이름이 참 예뻤다. 책 안을 살펴보니 내가 재미나게 본 드라마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의 작가였다. 이상문학상도 받았고 현대문학상도 받았다. 그리고 여성작가였다.

원서 대신 소설책을 사들고 평소였다면 버스를 탔을 길을 걸어서 집으로 갔다.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대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두 권의 책은 기대했던 것보다도 재미있었다. 나는 열아홉이었지만 내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일에 대해 자주 생각하곤 했는데 그 소설책에는 작가가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느끼고 깨달았다고 여기는 이야기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나는 이런 문학 공부를 하는 곳이라면 그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재수를 해서 더 나은 대학에 가라는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방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그렇게 대학에 갔지만 막상 그 대학에서 나는 문학 공부보다 연극반 동아리 활동을 더 많이 했고 졸업 후 연극 공부를 하겠다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시 다녔다. 수능 성적이 내 인생의 폭을 결정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이 가득했던 열아홉 그해 겨울이 가끔 생각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떨치게 해 주었던 소설책 두 권도.

내가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내 방 책장 밑단에는 선생님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서울 종로서적에 처음 갔을 때 서점에 붙어 있던 ‘문학사상’ 잡지 광고에 실린 선생님의 사진을 몰래 떼어내 갖고 온 거였다. ‘큰 바위 얼굴’처럼 그 얼굴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길 바랐다.

그러던 나에게 기억에 간직할 만한 일이 생겼다. 2005년 국립극장 별오름극장에서 뮤지컬 ‘빨래’를 처음 올리게 되었을 때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표정을 살펴보고 있는데 사람들 가운데 선생님이 계신 것이었다. 너무 기쁘고 떨리는 나머지 그 자리에 서서 선생님을 바라보기만 했었다. ‘쫓아가 볼걸.’ ‘공연을 어떻게 보셨느냐고 물어나 볼걸.’ 나중에 후회가 되었다. 비록 선생님과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했지만, 존경하는 작가가 내가 처음으로 크게 올린 공연을 와서 보셨다는 것만으로도 나만의 큰 기쁨이고 자랑이 되었다.

박완서 선생님처럼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연극과 뮤지컬 대본을 쓰고 연출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와 내 주변 이웃들의 이야기를 여성의 시각으로 엮어내는 작품을 쓰고 싶은데 박완서 선생님에게서 영향을 제일 크게 받았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 재공연 준비 중인 ‘빨래’는 나영이라는 여성 주인공의 눈으로 보는 오늘날 서울의 모습에 관한 이야기다. 나영은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억울함을 겪는 한편, 이웃의 외국인 노동자와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인물인데 이 캐릭터는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다. ‘미망’,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의 주인공은 나영의 모습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됐고 ‘살아있는 날의 시작’,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는 여성의 경험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언젠가 나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처럼 내 유년 시절인 1980년대에 겪었던 일들을 희곡으로 쓰고 싶다. 또한 ‘미망’에서 상업을 일으키고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는 전태임처럼 현명하고 위엄 있는 여성이 나오는 역사물을 쓰고 싶은 욕심도 있다.

한 가지 욕심이 더 있다면, 나이가 들어서까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해서 우리네 삶을 진솔하게 풀어 내는 여성 연출가이자 희곡작가로 남고 싶다, 선생님처럼.

■“뮤지컬 ‘빨래’ 재밌게 봤지요”

“누군가 저에 대해 써 주신 것도 고마운데 ‘빨래’를 연출한 사람이라니 더 반갑네요.”

젊은 뮤지컬 연출가 추민주(32) 씨의 ‘마음속 별’로 꼽혔다는 말에 소설가 박완서(76) 씨는 즐거워하며 뮤지컬 ‘빨래’를 보러 갔던 날을 기억했다.

“2년 전쯤 국립극장 별오름극장에 가서 본 것 같아요. 공연 정보 없이 그냥 (정신과 의사) 이시형 선생이랑 몇몇이 몰려가서 봤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공연이 끝나고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열아홉 살의 추 씨가 책방에서 박 씨의 소설을 집어 들어 읽게 만들었던 ‘예쁜 이름’에 대해서는 “‘완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밤새워 얼굴을 맞대고 지어 주신 이름”이라며 “국민학교 다닐 때는 한자로 이름을 써야 했는데 획수가 많고 어려워 어릴 땐 그 이름이 싫기도 했다”면서 웃었다.

박 씨의 소설은 TV 드라마와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졌지만 무대에 오른 작품은 아직 없다. 박 씨의 소설 중 뮤지컬로 만들면 좋을 작품은 어떤 것일까?

추 씨는 ‘그 남자네 집’을 가장 먼저 꼽았다. “첫사랑에 관한 뮤지컬로 예쁠 것 같아서”란다. “소설에 나오는 장면 중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남녀 주인공이 따뜻한 어묵 먹고 하는 부분은 무대에서도 참 좋을 것 같아요. 그 장면에 러브 송도 한 곡 넣어서….”

박 씨의 신작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도 재미있게 읽었다는 그는 “선생님이 열심히 작품을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건강하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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