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서 만난 삼국유사]김춘추가 무기 감춘 무장寺

  • 입력 2003년 10월 30일 16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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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사(무藏寺) 터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 산등성을 바라보며 한 시간 넘게 걸어 왔을까? 가을비가 아침부터 차갑게 내린다. 경주의 보문관광단지에서 출발하여 덕동호수를 오른쪽에 두고 왕산마을이라는 곳을 찾았다. 자동차로 겨우 10분쯤 거리였다. 더 이상 오를 길 없는 골짜기의 입구에 차는 버려둔 채 가파른 골짜기 사이에 난 평탄한 산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가 이어지는 산길의 끝, 돌연 확 트이는 터가 나타나는가 했더니, 안개비가 빠르게 퍼져 내려와 삽시간에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주변을 감춘다. 잠시 잠깐일까, 여기에 오직 하나 남아있는 삼층석탑이 환영처럼 얼핏 보였다가 안개비 속에 묻힌다.

그렇게 길을 잃은 곳이 무장사 터다.

실은 너른 분지 위에 발달한 도시가 경주이다. 그러기에 경주는 시원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황룡사 터에 서보면 사방으로 확 트인 시야가 ‘바로 여기가 천년 왕국의 넉넉한 중심지였다’고 소리 없이 외치는 듯하다.

(왼쪽)무장사 터에 있는 삼층탑이다. 여기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 쌍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이 남아 있다. (오른쪽)고선사 터에 있던 삼층탑인데, 덕동호 때문에 고선사 터가 물에 잠기게 되자 경주박물관 뒤뜰에 옮겨 세웠다.

신라 사람들이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한 다음 수도를 한반도의 중심부 어딘가로 옮겨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렇지 않아도 하필 신라가 통일의 주역이 된 것을 마뜩찮게 바라보는 눈들이 있다. 특히 고구려가 통일을 주도하였더라면 만주도 우리 땅이었을 텐데…, 하는 시각 말이다.

그것은 오직 역사를 가정으로 보는 안타까운 탄식에 불과하지만, 그나마 통일 후에 수도라도 옮겨 나라의 꼴을 좀 더 북쪽으로 발전시켰다면 좋았으리라는 꼬리말은 붙일 만하다.

그렇다면 왜 옮기지 않았을까? 아마도 신라 사람들은, 아니 경주 사람들은 경주만한 곳을 찾지 못해서가 아닌가 싶다. 일부러 깎아 내지 않아도 너르게 펼쳐진 땅을 가진 경주. 거기에 마음껏 평평한 도심지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그걸 그냥 두고 떠나기는 아쉬웠으리라.

소박한 생각의 끝이지만, 지세가 그렇다면 경주는 지키기 또한 쉽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사방이 트여 외적의 침입에 하릴없이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장사 터는 경주에서 매우 특이한 곳이다. 너른 분지를 바로 곁에 두고 어쩌다 이런 산골짝이 나타나는지, 길이 서툰 나그네는 안개 속에 갖힌다.

여기가 무엇하던 곳인가?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태종(김춘추)이 삼한을 통일한 다음, 계곡 안에 무기와 투구를 감추어 두었다’고 이 절 이름의 유래를 설명한다. 무기를 감추어 둔 곳, 그렇다, 경주 사람들에게는 그처럼 은밀한 장소가 있었다. 경주가 경주 구실을 하는 데는 이런 곳이 뒷받침이 됐다.

가을비를 맞으며 무장사 터로 오르는 한 시간 남짓 만에 신발과 아랫도리가 거의 다 젖었다. 골짜기 사이로 난 길은 군데군데 지난여름 내린 비로 패어 험해졌고, 풀숲에 달라붙은 빗방울이 내게로 달려들어 온다.

일연도 이곳에 와 보았는지, ‘그윽한 골짜기는 삐죽 솟아나 마치 깎아서 만든 것 같다’고 쓰고 있는데, 그러기에 무기를 감출 만한 곳이려니 싶겠지만, 승려였던 일연의 눈에는 ‘그윽하고도 깊어서 저절로 빈 마음이 생기니, 곧 마음을 편히 하고 도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으로 보였다. 보는 이에 따라 이렇듯 달라지는 것인가.

글=고운기 동국대 연구교수 poetko@hanmail.net

:촬영노트:무장사 터까지는 그냥 걸으면 한 시간이면 족하지만, 무시로 나는 오색 단풍 터널과 황금빛 낙엽송 이파리들이 맴돌이 하는 개울 징검다리에서 사진을 찍으며 걷다보면 몇 시간이 훌쩍 간다.

무장사 터에서 조금 더 가면 확 트인 정상이 나오는데, 지금은 돌보는 사람이 없는 오리온 목장이다. 바람에 서걱대는 억새 소리뿐 너무나 조용해서 가끔 산비둘기 한 마리만 푸득거려도 놀랄 정도다. 겁이 많은 사람은 꼭 동행을 하도록.

이번 가을에 원시의 단풍 사진을 찍고 싶다면 무장사 터로 떠나보자. 다음달 3일 전후가 가장 좋겠다.

양 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tophoto@korea.com

(위)백률사로 오르는 길목에 네 면 가득 불상을 새겨 넣은 큰 바위가 있는데, 굴불사 터 사면석불이다. 남산 부처바위, 칠불암 사면석불과 더불어 조각 솜씨가 빼어난 사방불이다. (아래)보문관광단지 경주월드 건너편 마을인 천군동 들판에 삼층탑 두 기가 서있다. 본디 절터였지만 절 이름은 전해오지 않는다.

▼무장寺 터 지키는 외로운 삼층석탑▼

여기에는 소성왕(798∼800)의 왕후 계화(桂花)의 눈물겨운 사연이 담겨 있다.

소성왕은 무슨 까닭인지 왕위에 올라 1년 남짓 만에 세상을 뜬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이 죽은 ‘여름 4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를 꺾고 기와를 날려 보냈으며, 서란전의 발은 날려간 곳을 알 수 없고, 임해문과 인화문이 무너졌다’고 적고 있는데, 폭풍은 그냥 바람만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무너지기는 문만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왕의 자리는 아들로 이어져 애장왕(800∼809)이 등극한다. 그러나 나이 어린 아들은 10년을 근근이 버티다 숙부 곧 소성왕의 동생들에게 죽음을 당한다. 바야흐로 신라 하대의 혼란스러운 정국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남편을 졸지에 잃고 여린 아들을 왕위에 올린 계화왕후는, 일연의 표현대로라면, ‘슬픔이 지극하여 피눈물을 흘리고 마음은 가시에 찔리는 듯’하였을 것이다. 그런 왕후가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 절터 위쪽에 미타전을 지었던 것이다. 저들의 할아버지 김춘추는 무기를 감추었지만, 허황한 마음을 가눌 길 없는 후손들은 빈 마음이 생겨 도를 즐길 만한 곳으로 이 터를 찾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가 개고 햇빛이 살짝 비친다. 작지만 아담하고 정겨운 삼층석탑이 다시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며 무장사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걸어서 한 시간 내내 이어지는 협곡이 그지없이 완벽하게 천혜의 요새를 이룬 이곳은 해가 뜨자 아주 밝은 단풍으로 단장하여 황홀경을 연출한다.

그러다 뜻밖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본 도쿄(東京)의 서남쪽 분지를 무사시노(武藏野)라 부른다. 무기를 감춘 곳이라는 뜻이다. 신주쿠(新宿)를 출발해 무사시노를 달리는 열차에서 한 시간 남짓 흔들리자면 분지가 끝나는 곳에 고마무라(高麗村)가 나온다. 병풍처럼 산이 둘러치고 고마가와(高麗川)가 휘돌아 가는 요새에 만들어진 고구려 유민들의 마을이다. 거기에 고마진자(高麗神社)가 있다. 그 시절은 그랬던가 보다. 협곡에 무기를 감추고, 제 목숨을 지키자고 웅크렸다가, 허황한 때가 오면 절을 짓고 외로운 혼의 명복을 빌었던가 보다.

신라와 고구려, 무장사와 무사시노가 자꾸만 겹쳐져 다가온다.

▼주변에 가볼만한 곳▼

처음 만들 때는 말도 많고 탈도 많더니 이제 보문관광단지는 그런대로 격을 갖추어 가는 느낌이다.

단지로 들어가는 길가에 나란히 서 있는 단풍나무는 지금 한껏 뽐을 내고 있다. 선재미술관은 상설 전시 외에도 때때로 특별전을 열고 있으니 좋은 볼거리가 된다. 좀 편히 쉬자고 관광지를 찾는다면 이 나라에서 그나마 제주도와 경주밖에 없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다.

단지의 경주월드 앞으로 천군동 절터가 있는데, 절은 없어졌으나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두 개의 삼층석탑에는 감은사 터의 탑 못지않은 기품이 서려 있다.

보문관광단지에 여장을 풀었다면 무장사 터와는 반대 방향으로 소금강산 아래 백률사와 굴불사 터까지 갔다 오는 것도 좋다. 단지에서 나오다 구황교를 건너면 탈해왕릉을 지나 바로 이를 수 있다.

소금강산은 경주의 북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순교한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와 떨어진 곳이 백률사이고, 굴불사 터에는 사면석불이 남아, 사방을 돌아가며 신묘한 모습을 보여준다. 백률사 뒤쪽 소금강산 정상에도 삼존마애석불좌상이 있는데, 새긴 솜씨가 뛰어나다. 대웅전 뒤쪽으로 난 등산길을 따라 오를 수 있다.

경주를 몇 번 방문한 사람이라도 무장사 터를 찾기는 그리 쉽지 않다. 보문단지에서 무장사 터로 가자면 단지 안의 육부촌 앞에서 갈라지는 길을 타고 따라간다.

여기서 왕산마을까지는 6㎞ 정도. 가다가 포항으로 빠지는 삼거리가 나타나니 유의해야 한다.

이 삼거리를 지나면 오른편으로 덕동호수가 펼쳐지고, 이 호수 안에 고선사 터가 잠겨 있는데, 고선사 삼층석탑은 지금 경주박물관 안마당으로 옮겨져 있다. 보문관광단지 만들면서 문화계의 비판을 샀던 일 가운데 하나다.

자동차로는 왕산마을을 지나 직진하여 옛 오리온목장 사유지 표시와 초소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다. 길 한 쪽에 차를 세워둘 수 있으며, 여기서부터 무장사 터로 걸어서 오르는데, 피서철을 제외하고는 절터까지 갔다 오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한적한 산책로다.

다만 오가는 길에 쉬는 곳이 없고,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으므로, 저물 무렵의 산책은 절대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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