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⑩]양화환도

  • 입력 2002년 6월 13일 21시 32분


양화진(楊花津)은 서울 마포구 합정(合井)동 378의 30에 있던 나루다. 한양(서울)에서 김포 부평 인천 강화 등 당시 경기 서부지역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이 나루를 건너야 했다. 그래서 일찍이 한양의 외백호(명당의 바깥 서쪽 줄기)에 해당하는 길마재(鞍山) 줄기가 한강으로 밀고 내려오다 강물에 막혀 불끈 솟구친 바위절벽인 잠두봉(蠶頭峯·용두봉·龍頭峯이라고도 했고 지금은 절두산·切頭山이라 한다) 북쪽 절벽 아래에 나루터를 마련하고 이를 양화나루라 하였다.

이곳에서 출발한 나룻배는 맞은편 강기슭인 경기 양천(陽川)군 남산(南山)면 양화리 선유봉(仙遊峯) 아래의 백사장에 배를 대었다. 이곳 역시 양화나루였다. 원래 양천 양화리에 있던 나루가 양화나루였기 때문에 이 양화나루에서 건너가는 한양 잠두봉 아래의 나루도 양화나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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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 양화리는 동네 한강가에 버드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버드나무의 꽃이 필 때면 장관을 이루었으므로 ‘버드나무꽃 피는 마을’이란 뜻으로 이런 이름을 얻었다. 잠두봉 아래 양화진에서 떠난 배는 빗금을 그으며 하류쪽으로 흘러가서 선유봉 아래 양화진에 당도하고 거기서는 다시 빗금을 그으며 잠두봉으로 올라갔었다. 이것이 한강 양쪽의 양화진 도강 현황이었다.

한강은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강바닥이 높아져 점차 큰 배가 상류로 올라가기 힘들어진다. 따라서 나루도 하류쪽 나루의 효용가치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영조 30년(1754)에는 이 잠두봉 아래 양화나루에 어영청 소속의 진영(鎭營)을 베풀어 한강을 지키는 첫 관문으로 삼았다. 당연히 양화나루는 물론이고 주변의 공암나루, 조강나루까지 이 양화진 진장(鎭將)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됐다.

양화진에는 진병(鎭兵) 100명과 소속선 10척이 있었다. 이런 제도가 생긴 것은 이 그림이 그려지고 나서 14년 뒤의 일이다.

그러나 그림에서 보아도 이미 잠두봉쪽 양화나루가 나루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벌써 잠두봉 북쪽 기슭에 나루를 관장하는 관리들이 머무는 관청인 듯 번듯한 기와집이 여러 채 들어서 있고 그 아래 강가 버들 숲에도 기와집이 표현돼 있다.

빈 배들도 그 아래 강변 모래톱으로만 즐비하게 정박해 있다. 양천쪽 선유봉 아래 모래밭은 아무것도 없는 빈 터뿐인데 갓 쓰고 도포 입은 선비가 앞뒤로 시종을 거느리고 나타나서 종에게 배를 부르게 하자 사공이 거룻배 한 척을 쏜살같이 몰아 건너오고 있다.

선비 일행이 서 있던 선유봉 아래 양화나루터는 지금 영등포구 양화동 양화선착장으로 변해 있다. 신선이 내려와 놀 만큼 강가에 매혹적으로 솟구쳐 있던 선유봉은 1980년대 올림픽대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허물어버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없던 산도 만들어야 할 판에 있는 산조차 허물어 버린 몰풍류에 기가 막힐 뿐이다. 이 양화나루터 부근으로는 양화대교와 성산대교가 남북으로 놓여서 밤낮없이 차량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길손이 강 건너에서 소리쳐 부르면 사공이 배를 저어 건너와서 태우고 가던 260년 전 겸재 시대와 비교해 보면 어떠한가. 양화대교는 1965년 1월 25일에 제2한강교로 개통됐고 1981년 11월에 확장된 뒤 1984년 11월 7일부터는 양화대교로 불린다. 잠두봉 아래 양화진과 강 건너 선유봉 아래 양화진 모두가 1936년 4월에 경성부 확장에 따라 서울로 편입되었다.

영조 16년(1740) 비단에 채색한 23.0×29.4cm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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