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기자의 현장칼럼]헤라클레스에게 힘을…

  • 입력 2003년 6월 19일 17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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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병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찾다보니 정신과 육체가 가다듬어집니다.” 김태현 선수가 12일 서울 태릉선수촌 역도연습장에서 바벨에 기대 앉았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당뇨병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찾다보니 정신과 육체가 가다듬어집니다.” 김태현 선수가 12일 서울 태릉선수촌 역도연습장에서 바벨에 기대 앉았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한국 역도의 간판’ ‘아시아의 헤라클레스’ 김태현 선수(34)가 지난달부터 신문의 전면광고에 등장하고 있다.

㈜한국존슨앤드존슨 메디칼 라이프스캔의 혈당 측정기 광고에서 바벨을 들어올리는 그의 표정은 단호하다.

1990년 베이징(北京) 아시아경기대회, 1994년 히로시마(廣島) 아시아경기대회, 1998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3연패의 김씨는 1997년부터 당뇨병을 앓고 있다.

지난해 4월 당뇨병으로 발에 마비가 와 국가대표팀 현역에서 자진 은퇴했다가 8개월 만인 12월 다시 복귀했다. 대한역도연맹측은 당시 “김태현의 건강 상태가 좋아졌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도전하겠다는 의지가 강해 국가대표로 발탁했다”고 발표했다.

혈당측정 모습

체내 인슐린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아 혈당이 높아지는 당뇨병은 ‘침묵의 킬러(Silent Killer)’라고 불릴 만큼 현대 의학으로 완치가 불가능하다. 그는 어떻게 당뇨병을 이겨내며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을까. 12일 오후 서울 태릉선수촌 필승A 체육관 지하 1층 역도 연습장에서 186cm, 127kg 체구의 그를 만났다.

●화려한 날들

1969년 전남 보성군에서 태어난 김씨는 중학교 1학년이던 1982년 역도를 시작했다. 토목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사업 실패 후 알코올 중독이 됐다가 김씨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세상을 떴다. 올해 68세인 어머니는 고생하며 6남4녀를 홀로 키웠다.

김씨는 “중학교 내내 운동한다고 깝죽대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173cm, 60kg이던 그의 허약한 체격을 보고 교사들은 “가능성 보이지 않는 역도를 왜 하냐”며 뜯어말렸다.

그는 매일 10km씩 동네를 달렸다. 밤에는 홀로 학교 체육관의 불을 밝히고 역도 연습을 했다. 남들이 “안 된다”고 할수록 오기가 솟구쳤다. 당초 전남체육고 진학이 불가능했던 김씨는 정부가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전국의 체육고 입시정원을 늘린 덕분에 가까스로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역도는 몸무게가 주는 힘이 뒷받침돼야 하는 운동이다. 김씨는 “타고난 승부욕으로” 몸무게를 늘려 나갔다. 고기 위주로 닥치는 대로 먹었고, 음식물이 목구멍 바로 밑까지 가득 차는 느낌이 들 정도로 먹은 뒤 곧바로 잠을 청했다.

1988년 한국체육대에 입학한 김씨는 몸무게 110kg 이상 체급에 해당하는 ‘무제한급’ 역도 선수가 됐다. 1989년 국가대표가 된 후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 1991년 독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땄다.

그러나 메달 유망주로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국가대표팀 기수를 맡았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실격하자 “앞이 캄캄해져” 1993년 2월 국가대표팀을 떠났다. 의류사업을 하는 선배를 도와 일했지만 돈 버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세상에 쉬운 일 없고, 괜한 고민 해봐야 부질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6개월 만에 대표팀으로 복귀할 때는 온갖 잡념이 사라졌다. 200kg 바벨 무게가 20kg인 것처럼 가뿐히 느껴지는 극도의 집중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운동이 즐거워 밤에 잠을 못 이룰 정도로 흥분된 나날을 보냈어요. 연습 기록이 세계 기록을 앞서기도 했죠. 1996년 133kg, 1997년 138kg 등 몸무게를 계속 늘려 갔습니다.”

그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4위 등의 개가를 올렸다.

●당뇨병 찾아오다

1997년 7월 강원 강릉시로 전지훈련 갔을 때다. 운동 도중 자주 소변이 마려웠다. 운동하면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운동 도중 화장실 가는 일이 드물다. 여름철이어서 음료수를 많이 마셔 그렇겠거니 생각했는데 밤 10시 잠자리에 든 이후 다음날 아침 일어날 때까지 화장실을 2번이나 갔다. 소변량도 무척 많았다.

부쩍 늘어난 피로감은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3일 휴가를 얻어 쉬었지만 마찬가지였다.

피로를 호소하며 찾아간 병원에서 “혈당이 높다. 당뇨병이다. 과체중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진단을 받던 순간을 김씨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부모에게 당뇨병이 없었으므로 유전적 요인은 아니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았다. 의사는 “당뇨병을 극복하려면 몸무게를 줄여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의사 말을 들으면 운동할 수 없다”며 버텼다.

“근육은 운동에 최적인 상태를 기억하기 때문에 몸무게 130kg 때 내던 기록을 120kg 때는 도저히 얻을 수 없소. 운동은 내 존재의 이유란 말이오.”

당뇨병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던 그는 ‘왜 나에게 또 시련을 주나’며 한없이 신을 원망했다. 병원에서 혈당강하제를 권했지만 거부했다. 자신에게 찾아온 당뇨병을 부정한 것이다.

누에 가루, 홍삼 엑기스, 뽕나무잎 추출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당뇨병에 좋다는 민간요법을 찾아 쓴 돈만 수천만원. 당뇨병을 ‘인생의 평생 동반자’로 받아들이기까지는 그로부터 3년의 세월이 걸렸다.

당뇨병은 심근경색, 중풍 등 2차적인 합병증이 수반돼 죽음에까지 이르는 무서운 병이다. 운동, 균형 잡힌 식사, 꾸준한 혈당 측정 등 끊임없이 자기 관리를 해야 합병증을 막을 수 있다. 의료계에서는 당뇨병이야말로 흡연 과식 과음 운동부족 등 잘못된 생활습관에서 비롯된 ‘생활습관병(Life Style Disease)’이라고 입을 모은다.

●마음을 다스리는 연습

“살아온 것을 되짚어보다가 당뇨병을 인정하게 됐어요. 운동이 잘 되면 욕심을 부렸고, 의욕이 지나치니 스트레스가 됐어요. 당뇨병을 만나고 나서 마음을 다스리기가 얼마나 힘든지 깨닫고 있어요. 정신과 육체를 가다듬는 자아여행이 시작된 거죠.”

김씨는 매일 오전 6시부터 30분 동안 태릉선수촌 안 숲길을 홀로 달리며 자연을 호흡한다. 낮은 경사의 오르막길을 너무 빠르거나 느린 속도로 달리면 안 된다. 당뇨병 환자는 격렬한 운동을 하면 오히려 혈당이 올라간다. 그는 달리기를 통해 중용(中庸)을 배운다고 했다.

밤 9시부터 30분 동안은 태릉선수촌 대운동장의 400m 트랙을 5바퀴 달린다. 달리기를 마친 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올려다보는 밤하늘의 영롱한 별빛은 살아 있음이 행복함을 일깨운다.

한때 공복시 혈당 수치가 혈액 1dL(0.1L)당 300mg에 이르렀지만 지금은 정상 수준인 100∼110mg/dL을 유지하고 있다. 손가락 끝에 혈당침을 꽂아 뽑아낸 혈액으로 혈당 수치를 재는 일은 불과 5초밖에 걸리지 않지만 많은 당뇨병 환자들이 간과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새벽 공복, 매 끼니 식사를 한 2시간 후, 밤 10시 취침 전 등 하루 5번 거르지 않고 혈당을 측정한다. 운동량과 식사량 등을 기록할 때는 ‘내가 도를 닦고 있구나’란 생각도 든다.

마음을 모질게 먹어도 인간인지라 때때로 의지가 무너진다. 가을 겨울보다 봄 여름에 식욕이 당기면서 혈당 수치가 확 올라간다. 2000년 성격 차이로 1년여의 결혼 생활을 접고 이혼한 그에게는 당뇨병과의 고독한 여정에 동행해 줄 포근한 가정의 울타리가 없다.

그는 “좌절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자괴감에 빠져 술을 마실 때도 있지만 다음날 아침 높아진 혈당 수치를 눈으로 확인하면 곧바로 산책 시간을 늘린다.

“살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나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산책은 나의 원칙과 목표를 만나는 시간이에요.”

그는 지난해 11월 제83회 전국체육대회 역도 남자 무제한급(체중 105kg 이상) 인상 경기에서 205kg을 들어 올려 자신이 종전에 세운 한국 기록(인상 203kg)을 갱신했다.

1989년부터 김씨와 국가대표 선수로 함께 활동했던 현 역도 국가대표팀 이형근 감독(39)은 말한다.

“태현이가 숙소에서 혼자 혈당 측정하는 모습을 볼 때면 처량하고 측은하다. 경기를 앞두고 몸무게를 늘려야 하는 그에게 당뇨병은 가혹한 시련이다. 지난해 대표팀 은퇴 후 아테네 올림픽에 도전하겠다며 복귀를 의논해 왔을 때 나는 말렸다. 그러나 그의 환한 웃음은 많은 희망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고요하지만 강한 생명력이었다.”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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