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구노트]서울대 서양사 주경철교수

  • 입력 2001년 8월 5일 18시 27분


내가 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서구의 흥기(興起)’(The Rise of the West)라는 고전적인 주제로 표현할 수 있다.

오늘날 유럽과 미국이 전세계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근대사는 결국 이러한 서구의 우위가 확립되는 과정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근대 이전부터 언제나 서구가 이처럼 우위를 차지했었는지 묻는다면 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유럽 문명은 중세말-근대초만 해도 전세계에서 중하위권에 속해 있었고, 17∼18세기에도 아직 다른 문명권에 비해 압도적인 힘의 우세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과 같은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이 300, 400년을 경과하면서 유럽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역동적인 힘을 얻고 급기야 다른 문명권을 지배하는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나는 박사 논문을 쓰면서 네덜란드라는 작은 나라를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 나라의 미래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했다. 작지만 강한 나라, 무엇보다도 평화로운 나라,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문화적으로 독창적인 나라, 그러면서도 국수주의에 빠지지 않고 세계 문화에 대해 열려 있으며 관용이 완전히 정착된 나라…. 유럽 근대사에서 네덜란드의 역사가 가진 특이성은 이런 것들이다. 아마도 10년 내외의 중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다시 이 문제로 돌아와서 좀더 자세히 다루어 볼 것 같다.

그러나 그 이전에 먼저 기초 작업이 필요하다. 유럽 문명과 세계와의 조우를 분석하는 일이다. 그래서 조만간 16∼18세기 유럽의 해상 팽창에 대한 전반적인 개괄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유럽이 흥기하고 지배력을 키워가는 것이 유럽 내의 요인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전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분명히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젤란이 어디를 통과해 갔느냐 하는 식의 ‘지리상의 발견’의 역사를 쓰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유럽 문명이 해상을 통해 전세계로 팽창해 나갔을 때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군사 정치적 요인, 경제적 관계의 형성 그리고 문화적 상호 교류 등의 여러 차원에서 검토하고 싶은 것이다.

자칫하면 과대망상적인 연구 계획이 될 수도 있겠으나, 관련된 역사 사실 전체를 정리한다기보다는 유럽과 세계문명 간의 새로운 역사적 관계 형성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이 작업이 세계 혹은 세계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우리의 시각을 정립하는 데에 필요한 기초가 되리라 기대해 본다.

물론 이 연구를 진행할 때 유럽중심주의라는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다. 세계가 유럽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 것은 유럽이 우수했기 때문이라는 동어반복적인 결론을 내리기 십상이지 않겠는가? 물론 나의 의도는 그와는 정반대이다. 그 동안 우리가 너무 쉽게 서구에서 만들어진 설명들을 그대로 수입해다가 퍼뜨린 점을 반성하고 이제 우리 나름의 시각을 정립하자는 것이다.

주경철(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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