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의&joy]한송이 ‘하얀 연꽃’ 오대산

  • 입력 2006년 12월 23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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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어디로 가시는가.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고, 삶은 갈수록 막막하기만 하다. 하늘 들어가는 문을 몰라 새들은 늘 나뭇가지에 앉는다던가. 중생들은 늘 산문 밖 저잣거리에서 ‘길 없는 길’을 찾아 헤맨다. 눈 덮인 오대산 상원사 전나무 숲길. 길을 떠나는 스님들의 뒷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 오대산=김미옥 기자
그대 어디로 가시는가.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고, 삶은 갈수록 막막하기만 하다. 하늘 들어가는 문을 몰라 새들은 늘 나뭇가지에 앉는다던가. 중생들은 늘 산문 밖 저잣거리에서 ‘길 없는 길’을 찾아 헤맨다. 눈 덮인 오대산 상원사 전나무 숲길. 길을 떠나는 스님들의 뒷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 오대산=김미옥 기자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땐 발걸음을 함부로 내딛지 말라

오늘 내가 남긴 이 발자국은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서산대사(1520∼1604)

과연 그런가?

오늘의 내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는가? 아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의 길이 있다.

내 발자국은 ‘오직 내 발자국일 뿐’이다.

남의 발자국을 뒤따라가는 순간 난 없다.

비록 갈지자일망정 내 걸음을 걸어야 한다.

생로병사(生老病死).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것.

그것을 누가 대신해 줄 것인가.

내가 그 운명의 짐을 지고, 무소의 뿔처럼 가야 한다.》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에 눈이 내렸다. 껑충 큰 전나무 머리에 희끗희끗 눈발이 쌓였다. 전나무 가지는 그늘로 뻗는다. 햇살은 그 전나무 어깨 틈새로 비껴든다. 숲은 적막하다. 바람이 가끔 “쏴아∼” 하고 숲을 흔든다. 나무 냄새가 향긋하다. 푸른 하늘, 하얀 구름. 월정사 전나무 숲은 오대산으로 들어가는 산문(山門)이다. 길이 1.2km. 중생은 이곳에서 속세의 때를 벗고 부처님 땅에 들어간다. ‘바람 샤워’로 욕망과 집착의 비린내를 씻는다.

숲길은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걸어야 제 맛이다. 어깨에 힘을 빼고 편안한 마음으로 어슬렁거려야 한다. 한 호흡에 한 걸음씩, 슬로모션으로 발을 떼야 한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발을 뒤꿈치부터 천천히 들어올려 앞쪽으로 옮기고, 숨을 내쉬면서 발을 역시 뒤꿈치부터 천천히 땅에 내려놓는다. 누가 보든 말든 신경 쓸 것 없다. 그래도 정 마음에 걸리면 그냥 무심하게, 가는 듯 마는 듯 달팽이처럼 걷는다.

■흙길 - 월정사 전나무숲∼상원사 8.8km

오대산은 다섯 봉우리가 만드는 거대한 연꽃 봉오리다. 가을에 단풍이 들면 붉은 연꽃이 핀다. 겨울에 흰 눈이 내리면 백련 꽃이 벙긋 입을 벌린다. 연꽃은 풍만하다. 함초롬하지 않다. 오대산은 흙산이다. 울퉁불퉁 역도선수 같은 근육질이다. 둥글면서도 후덕하다. 그러나 전나무 잎은 뾰족한 바늘잎이다. 전나무 숲길은 월정사 부도 밭을 지나 신작로 흙길(지방도 446호선)로 이어진다. 상원사∼북대 미륵암∼두로령∼명개리까지 60여 리 길(25km). 평상시라면 걸어서 6시간쯤 걸리지만 겨울 눈길은 훨씬 더 걸린다. 눈길에선 아이젠 착용은 필수. 왕복 거리와 시간을 예상해 적당한 곳에서 돌아오면 된다. 길은 가장 낮은 골짜기를 따라 가르마처럼 나 있다. 아스팔트길이 아니어서 좋다. 눈 밝은 스님들의 굳은 ‘소신’ 덕분이다. 오대산 일대 1770만 평의 땅이 월정사 소유인 것도 큰 힘이 됐다. 여름엔 그 흙길을 맨발로 걷는 사람도 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는 걸어서 두 시간 정도면 닿는다. 진부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1시간 간격으로 있지만 이 길을 차 타고 가기엔 아깝다. 길옆에는 오대천이 흐른다.

■눈길 - 상원사∼명개리 신작로 16.2km

상원사∼명개리(16.2km) 구간은 눈이 발목까지 쌓여 차량은 내년 봄이나 돼야 오갈 수 있다. 오직 사람만이 다닐 수 있다. 그만큼 걷기에 호젓하다. 눈을 밟으면 발밑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풍경이 맑게 울린다. 한참 걷다 보면 눈이 머릿속으로 들어와 가슴속까지 채운다. 발은 눈이 되고, 눈은 길이 된다. 길은 몸속으로 들어왔다가, 몸 뒤로 사라진다. 길은 내가 되었다가, 내가 다시 길이 된다. 눈길은 끝이 없다. 발길을 멈추면 길은 끝나고, 다시 발을 떼면 길은 열린다. 바람은 앞으로 나가는 내 몸을 막고, 난 그 바람을 머리로 들이밀고 한 발씩 눈 속에 밀어 넣는다. 발은 아늑하고 편안하다.

상원사에서 10여 리쯤 눈길을 밟아 올라가면 바로 왼편에 북대 미륵암(1300m)이 나온다. 두 스님이 동안거 묵언정진 중이다. 그 부근엔 고려 말 나옹선사(1320∼1376)가 좌선을 하던 나옹대도 있다. 큰 바위에 작은 돌을 쌓아 평평하게 하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았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나옹선사의 선시다.

눈길 만행(卍行). 후드득! 이름 모를 산새가 눈꽃을 털며 날아간다. 난 왜 걷는가. 난 누구인가. 왜 늙은 노새처럼 늘 헉헉거리며 사는가. 강원 산간지방에 대설주의보가 내리면 월정사 전나무 숲길로 달려가 걸어 보라. 텅 빈 눈꽃 숲 속을 걸어 보라.

김화성 기자 mars@donga.com

■오대산은

비로봉(1563.4m)-동대산(1434m)-두로봉(1422m)-상왕봉(1491m)-호령봉(1561m)의 다섯 봉우리가 한 송이 연꽃을 이룬다. 월정사와 전나무 숲은 그 밑을 받치는 푸른 연잎인 셈이다.

연꽃잎으로 둘러싸인 성안은 부처의 나라다. 동서남북 산허리와 그 한가운데에 보살들이 살고 있는 다섯 ‘대(臺)’가 있다. 그래서 오대산이다. ‘대(臺)’는 불상을 받치고 있는 좌대나 같다. 동대 관음암에는 일만 관세음보살, 서대 염불암에는 일만의 대세지보살, 남대 지장암에는 일만의 지장보살, 북대 상두암에는 미륵불이 산다. 중대 사자암엔 일만의 문수보살이 있는 곳이며 비로자나불을 모신다.

연꽃의 꽃술은 어디일까?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다. 중대에서 비로봉을 향해 20분쯤 올라가다보면 나온다. 부처님 사리가 있기 때문에 이곳에선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는다.

상원사를 출발해 비로봉∼상왕봉을 거쳐 북대사로 내려오는 눈꽃 산행도 환상적이다. 평상시엔 5시간 정도 걸리지만 눈길은 2∼3시간쯤 더 잡아야 한다. 눈이 많이 오면 입산이 통제될 때도 있다.

■가는 길

승용차로는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진부 톨게이트에서 빠져 월정사로 가면 된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가려면 동서울터미널(지하철 2호선 강변역)에서 진부행 버스를 탄다. 진부에서 월정사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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