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극단 신기루만화경의 ‘설공찬전’

  • 입력 2009년 1월 22일 02시 55분


돈 - 권력 위해 영혼 파는 세상에 일침

1997년 한글소설본이 발견돼 ‘홍길동전’을 밀어내고 최초의 한글소설 자리를 꿰찬 ‘설공찬전’은 조선 중종조에 이미 금서(禁書)가 된 작품이다. 명분은 혹세무민하는 혼백의 세계를 다뤘다는 것이었다. 저승세계를 소개하면서 현실 권력을 매섭게 풍자한 대목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중종 시대 권력층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극단 ‘신기루만화경’의 연극 ‘설공찬전’(이해제 작, 연출)은 이 고전소설에서 저승세계에 대한 소개는 빼고 권력의 생리를 비판한 내용을 전면에 부각했다. 요절한 수재 설공찬(황도연)은 죽은 지 3년 뒤 아버지 설충란(임진순)에게 못다 한 효도를 하려고 망나니 사촌동생 설공침(정재성)의 몸에 강림한다.

여기서 작품은 공침의 몸을 빌려 뮤지컬 ‘지킬 앤드 하이드’식의 선악 대결을 한국적 해학으로 녹여낸다. 정재성씨는 점잖은 공찬과 패악스러운 공침이 한 몸을 두고 벌이는 입씨름과 몸씨름을 능청스럽게 풀어낸다.

당대 실세인 정익로(이장원) 대감을 구워삶아 아들에게 관직의 길을 열어주려는 공침의 아비 설충수(최재섭)는 죽은 공찬이 아들의 몸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묵인한다. 공침의 몸을 빌린 공찬이 정 대감 앞에서 감춰뒀던 자신의 경륜을 펼치려는 순간, 정 대감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그의 입을 막는다.

“세상엔 많은 문답이 있다. …그 물음이 어디에서 흐르느냐에 따라 그 대답의 방법이 엄연히 달라지는 것. 그것이 세상 살아가는 법이다. 자, 중천에 해가 떠 있다. 내 눈엔 저 해가 네 개의 모가 있는 바둑판으로 보이는데 자네의 눈엔 어떻게 보이는가.”

한때 세상을 내려다보긴 같지만 스스로 몸을 드러내는 해와 몸을 감추는 달은 서로 다른 족속이라고 일갈했던 공찬은 이 문답을 통해 권력의 본질을 깨닫고 이 몸 저 몸으로 옮겨 다니며 한바탕 놀이를 펼친다.

작품은 정권교체기 ‘영혼 없는 공무원들’의 행태를 수없이 목도하는 요즘의 현실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중국어 발음으로 한자성어를 남발하는 정 대감은 어색한 영어 발음으로 세간의 비웃음을 사던 지식인들을 연상시킨다. 요즘 세태에 대해 직접적이면서도 매서운 비판의 수위를 높인다면 더욱 호응이 뜨거울 작품이다. 서울 대학로 정보소극장에서 2월 8일까지. 2만 원. 02-764-7462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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