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현의 바둑세상만사]정정당당한 수를 두어라

  • 입력 2000년 9월 19일 11시 09분


바둑을 자주 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위기십결(圍棋十訣)이란 걸 들어보게 된다. 위기십결은 바둑을 두면서 가져야 할 마음자세, 또는 바둑을 이기기 위한 전략을 10가지로 압축해서 정리한 일종의 금언이다.

첫 번째 부득탐승(不得貪 :이기려고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이기기 어렵다)에서 시작해 열 번째 세고취화(勢孤取和:불리하면 싸우지 말고 평화를 취해라)로 끝나는 위기십결은 잘 새겨두면 기력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바둑의 독특한 지혜다.

그 위기십결의 여덟 번째 항목이 바로 동수상응(動須相應)이다. 뜻을 옮기자면 '상대의 움직임에 맞추어 바둑을 두라'는 의미인데, 위기십결 중에서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편에 속하는 항목이다. 바둑은 상대와 교대로 한 수씩을 두어야 하므로 상대가 어떤 수를 두었을 때 거기에 올바른 수로 대응하라는 교훈으로 받아들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동수상응을 뒤집어 얘기하면 '딴청 피우지 말라'거나 '가는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우리 속담과도 은연 중 뜻이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상대가 있는 거의 모든 게임에서는 동수상응이 적용된다. 씨름에서 상대가 기술을 걸려하면 되받아쳐야 하고, 권투에서 상대가 펀치를 날리면 피하거나 카운터 펀치를 노려야 한다.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 있는 스타크래프트에서 상대가 뮤탈을 열심히 만드는데 나는 탱크만 뽑고 있다면 결과는 젊은이들 표현대로 '주금'일 뿐이다. 동수상응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수상응을 종종 무시하는 듯한 집단이 있어 가끔씩 국민들을 걱정스럽게 만드는데, 바로 정치인들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상대를 인정하는데 왜 그리 인색한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추석을 앞두고 야당에서 장외집회를 가지더니, 이제는 한빛은행 부정대출사건의 특검제 도입이 도마 위에 올랐다. 국회를 무시하고 길거리로 나간 야당은 보는 시각에 따라 지지와 반대가 엇갈릴 수도 있다. 한빛은행 부정대출 사건에 특검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현직장관 관련설로 인해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문제는 정부 여당의 대응이다. 야당의 정치공세에 맞서 정부 여당도 그에 상응하는 당당한 수를 두어야 한다. 정치도 상대가 있는 만큼, 야당이 여당을, 여당이 야당을 파트너로 인정한다면 상대의 응수를 무시하거나 서로 딴청만 피워서는 안된다.

상대가 잘못된 수를 두었다면 손을 빼고 다른 데를 두어도 무방하다 . 그러나 상대가 올바른 수를 두었다면 그 수를 인정하고 거기에 솔직한 대응을 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타협에 인색할 필요가 없다. 정정당당한 타협은 야합과 다르다. 바둑도 내 돌이 위태로우면 재빨리 두 눈 내고 사는 게 잘 두는 바둑이다. 그걸 두고 비겁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위기십결 대로만 바둑을 두면 누구라도 바둑을 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교훈을 알면서도 막상 바둑판 앞에 앉으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간들이다.

바둑판 앞에서도 그럴진대, 하물며 정권을 다투는 정치계에서는 오죽할까 짐작은 하면서도 그들이 동수상응하리란 기대를 끝끝내 버리지 못하는 게 유권자의 마음인 것이다.

김대현<영화평론가·아마5단> momi21@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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