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고모리 시게타카 후지필름 사장

  • 입력 2009년 7월 31일 02시 59분


日공영방송 개혁 이끈 고모리 시게타카 후지필름 사장
“공영방송, 관청처럼 방만하기 쉬워… 늘 비용절감 고민해야”

《디지털 시대의 개막과 함께 아날로그필름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일본 후지필름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고모리 시게타카(古森重隆·69) 사장의 리더십 아래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하면서 위기 탈출에 성공했다. 이를 통해 고모리 사장은 ‘구조조정의 달인’이라는 평판을 얻었고, 이것이 계기가 돼 일본 공영방송 개혁을 총괄 지휘하는 NHK 경영위원장으로 발탁됐다. 본보는 한국 언론 중 처음으로 고모리 사장과 단독인터뷰를 갖고 그의 ‘공영방송론’과 후지필름의 변신 노력을 들어봤다.》

“국민세금 받는 공영방송 흥미보다 국익 대표해야
NHK 경영위원장 맡아 작지만 강한 경영 관철
자본에 휘둘리지 않으면 신방겸영 못할이유 없어”

“국민이 낸 수수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은 관청처럼 방만하게 운영되기 쉽습니다. 프로그램 하나를 만들 때에도 어떻게 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을까 늘 고민해야 합니다.”

지난해 말까지 NHK 경영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고모리 시게타카 후지필름홀딩스 사장은 23일 일본 도쿄(東京) 미나토(港) 구 롯폰기(六本木) 미드타운빌딩 내 후지필름홀딩스 본사에서 본보와 단독 인터뷰를 갖고 이같이 말했다. NHK 경영위원회는 NHK의 회장과 감사를 임면하고 예산 및 사업계획을 의결하는 기관이다.

고모리 사장은 “공영방송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방송이기 때문에 흥미보다는 국가의 공식 견해나 국익을 대표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이는 편협한 내셔널리즘으로만 볼 문제는 아니며 글로벌 시대에 더욱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신문과 대기업의 방송시장 참여와 관련해 그는 “일본이나 유럽에서 신문과 방송의 겸영은 흔한 현상”이라며 “매스컴이 대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성만 갖춘다면 한국도 (신문-방송 겸영을) 못할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일본에서는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 산케이 등 주요 신문사가 방송을 소유하고 있다.

고모리 사장은 “기업이든 방송이든 조직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정보 중 가장 본질적인 정보를 파악해야 한다”며 개혁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경영자의 야성”이라고 말했다. 또 “기업 환경이 좋지 않을수록 새롭고 독창적인 상품을 만들어 기업 내부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 경영자의 임무”라고도 했다.

그는 2003년 당시 생사의 기로에 놓인 후지필름의 최고경영자(CEO)로 부임하면서 경영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아날로그 필름에서 디지털 필름으로 넘어가는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해 쇠락의 길을 걷던 후지필름의 구원군으로 나선 것. 고모리 사장은 후지필름의 ‘본업’인 필름과 카메라 사업을 축소하는 대신 화장품 평판디스플레이(FPD) 헬스케어 등 신시장으로 진출하면서 대반전을 일궈냈다. 후지필름은 2007년 매출액 2조8468억 엔, 영업이익 2073억 엔으로 창사 이래 최고 실적을 올렸다.

그는 이 같은 경영성과를 인정받아 2007년 6월 NHK 경영위원장으로 취임했다. 20년 만에 처음 외부 인사인 후쿠치 시게오(福地茂雄) 전 아사히맥주 회장을 NHK 회장으로 영입해 NHK 조직을 쇄신하는 등 NHK에 민간기업식 고강도 경영 개혁을 추진해 화제가 됐다.

또 NHK 설립 이후 처음으로 수신료 인하를 추진했는데, 당초 7% 인하를 주장한 NHK 집행부에 맞서 10% 인하 안을 관철시켰다. 이때 내세웠던 원칙이 비용을 줄이고 조직을 간소화하지만 강한 경영, 이른바 ‘슬림 앤드 스트롱(slim and strong)’이다.

도쿄=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 변화 선택한 후지필름

▼화장품 - LCD재료 진출 ‘역발상’ 망한다던 필름회사 살려내▼
필름재료 이용 신사업 개척
R&D센터 칸막이 없애 ‘통합형 개발’의 산실로

“뭐? 우리가 화장품을 만든다고?”

화장품 사업을 하겠다는 사장의 선언에 후지필름 직원들은 술렁거렸다. 2000년 이후 필름 매출이 매년 25%씩 줄면서 “이런 속도라면 3, 4년 내 파산한다”는 경고가 나오던 시점이었다.

고모리 시게타카 사장은 사진 필름의 가장 중요한 재료가 ‘콜라겐’이란 단백질이라는 데 착안해 이를 인간의 피부에 적용해 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또 사진의 변색을 막기 위해 연구해 온 ‘아스타키산틴’이라는 항산화 성분 역시 피부 노화를 억제하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필름 기술로 만든 화장품

고모리 사장은 즉시 ‘라이프사이언스’ 사업부를 만들어 서열 2위이자 최고재무책임자(CFO)인 다카하시 도시오(高橋俊雄) 전무를 본부장에 앉혔다. 화장품 연구 인력의 90%를 필름 분야 연구원들로 채웠다. 이렇게 해서 2007년 9월 ‘아스타리프트’라는 브랜드가 등장했다. 후지필름은 ‘콜라겐을 통한 피부 재생’을 내세워 중년 여성층을 공략했다.

다카하시 전무는 “필름회사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했고 화장품업계의 후발주자이다 보니 초기엔 어려움이 컸다”고 말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역발상. 기능성 화장품인 만큼 후지필름의 기술력을 앞세워 오히려 후지필름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와 함께 30대 이상의 트렌디한 주부가 많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입소문을 냈다. 또 1980년대 인기 아이돌 가수 마쓰다 세이코(松田聖子·47) 씨와 1970년대부터 활동한 싱어송라이터 나카지마 미유키(中島みゆき·57) 씨 등 중년 여성 스타 두 명을 모델로 내세운 광고를 만들어 길거리 대형 전광판에까지 내보냈다. 그 결과 아스타리프트를 판매하는 매장이 전국적으로 4000개 이상으로 늘었고 메디컬·라이프사이언스 사업부의 매출도 회사 전체의 10%까지 올라갔다. 다카하시 전무는 “10년 내 매출액 1조 엔을 돌파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화장품과 함께 후지필름 미래 사업의 양대 축으로 꼽히는 액정표시장치(LCD) TV용 고성능 필름에도 얇은 두께, 균일한 표면, 투명성 등 70년 넘게 유지해온 필름 기술을 적용했다. 주요 고객은 삼성전자 등 한국의 전자기업으로 전체 수출량의 50% 이상이 한국으로 오고 있다. 이 때문에 2005년 4월 400억 엔을 들여 규슈(九州) 구마모토(熊本) 현에 한국 수출 제품용 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FPD재료사업부장 아베 히사마사(阿部久正) 상무는 “연간 세계 TV 수요 2억 대 가운데 1억3000만 대가 LCD TV인 것을 감안하면 FPD재료사업은 21세기 후지의 핵심사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경계를 허문 연구개발(R&D)센터

투명 유리, 탁 트인 공간, 곳곳에 보이는 녹지…. 미술관을 연상케 하는 이곳에는 칸막이가 없다. 일본 가나가와(神奈川) 현 아시가라카미(足柄上)에 위치한 후지필름 선진연구소의 모습이다.

연구원들은 지그재그 형태의 책상에 앉아 마주보며 회의를 하고 있었다. ‘퓨전 연구’를 지향하는 후지필름의 R&D센터다. 이곳은 고모리 사장 개혁의 ‘히든카드’로 평가받고 있다. 고모리 사장은 후지필름이 가진 기술을 토대로 ‘통합 교과형’ 사업을 하자는 취지로 각 연구소에 흩어진 연구원들을 한데 모아 2006년 4월 연구소를 세웠다. 현재 화학, 전자, 의학, 필름 등 각 분야 연구원 900명이 파견근무 형태로 함께 연구하고 있다.

연구소의 사사키 야스토모(佐佐木康友) 과장은 “새로운 기술 구축이 가능한지, 시장성이 있는지, 경쟁사와 차별화되는지 등 3가지 사항을 통과해야 신성장 사업으로 인정받는다”고 말했다.

연구소는 연구원들의 자유로운 아이디어 발제를 위해 다양한 시스템을 도입했다. 자신의 아이디어와 연구 결과를 다른 연구원에게 공개적으로 발표하고 함께할 인력을 모집하는 ‘터치 존’ 프로젝트 등이 대표적이다. 연구소 곳곳의 탁자에는 칠판이 붙어 있어 언제든지 회의하고 낙서할 수 있게 했다. 사사키 과장은 “함께 마주보며 회의하는 기회를 최대한 많이 마련해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도쿄=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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