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 기자의 스포츠 인생극장]<26>돌아온 테니스 스타 이형택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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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집은 작고 힘은 모자라… 믿을 건 땀밖에 없었죠”

인터뷰 장소는 인천 아시아경기 테니스가 열리고 있는 ‘열우물 코트’였다. 코트 이름이 낯설어 스마트폰을 두드렸다. 옛날 물이 귀하던 시절 집집마다 파기만 하면 물이 솟아 한 동네에 우물이 열 개가 넘었다는 유래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주소지가 인천 부평구 십정동(十井洞). 꿈보다 해몽 아닌가. 화수분처럼 유망주가 샘솟기를 바라는 그럴싸한 작명이라는 생각이 들던 사이 한국 테니스의 간판 이형택(38)이 나타났다. 그를 만난 22일에 한국 테니스는 남녀 단체전을 모두 8강에서 탈락해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우물’이 말라버린 한국 테니스의 현주소였다. 응원하러 모처럼 경기장을 찾은 이형택은 “그래도 안방인데 좋은 기회를 못 살렸다”고 안타까워했다.

○ 잊을 수 없는 아시아경기의 추억

이형택은 이번 개회식에서 때 아닌 유명세를 치렀다. 그는 JYJ가 대회 주제가를 부르던 5분 가까이 성화봉을 들고 있다 최종 점화자인 이영애에게 건네줬다. 축제의 개막을 알리는 결정적인 역할이었다. “TV에 내 얼굴이 꽤 오래 클로즈업된 모양이다. 다음 날 전화기에 불이 났다(웃음).” 이 행사는 이영애의 등장에 대한 논란이 거셌다. 이형택은 “그 하루 전날 최종 리허설에서 이영애 씨 얘기를 들었다. 이 씨가 혼자 성화에 불을 붙이려다 그 사실이 미리 새어나가 어린 선수 두 명이 급조됐다는 소문은 사실과 다르다. 원래 시나리오에도 그리 돼 있었다. 어린이가 우리의 미래라는 걸 보여주는 의미였다”고 털어놓았다.

아시아경기는 이형택의 시선을 더 큰 무대로 옮기게 한 전환점이었다. 1998년 방콕 대회에서 남자 단체전 우승으로 병역 혜택까지 받아 국제 대회로 직행했다. “그때 금메달이 없었다면 국내에 안주하며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메이저대회 US오픈 16강, 남자프로테니스(ATP)투어 대회 우승, 세계 랭킹 36위, 통산 상금 200만 달러 돌파…. 그가 한국 테니스 역사에 남긴 위업은 셀 수 없이 많다. 아시아경기에서도 금 2, 은 4개를 땄다.

○ 가위바위보가 바꾼 삶

강원 횡성의 산골마을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이형택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테니스와 인연을 맺었다. 이보다 한 해 앞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식당일을 하려고 서울로 떠났다. 할머니 밑에서 자란 막둥이였던 그에게 라켓은 고단한 삶을 잊게 해주는 벗이자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이었다. “원래 축구 선수로 뽑혔는데 형들과의 가위바위보에서 이겨 테니스로 바뀌었다. 공을 잘 튀기고 운동에 소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에 밥과 김치뿐인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면서도 운동에 매달렸다. 테니스부에서는 건빵이나 과자도 먹을 수 있었다. 그는 일찍이 객지 생활을 했다. 원주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고교는 춘천(봉의고)으로 갔다. “중학교 때 양구에서 합숙 훈련을 하는데 밤마다 엄마 생각이 나 울다 지쳐 잔 적도 많다. 그러면서 마음이 단단해졌다.” 해외에 나가면 왜소한 축에 드는 그는 “나는 엄청난 파워를 지니지 못했고 시속 220km짜리 서브를 넣는 것도 아니다. 핸디캡을 극복하려면 상대보다 더 많이 뛰고 빨리 쳐야 했다”고 말했다. 근력과 스피드를 키우려면 땀밖에 없었다. 이형택은 해외 대회에 나갈 때면 손가방 안에 항상 아령과 고무 밴드를 갖고 다니며 비행기나 호텔에서도 쉼 없이 근육을 키웠다. 엄동설한에 물을 뺀 수영장에서 공을 친 것은 유명한 얘기다.

○ 누군가 나를 넘어설 그날을 위해

이형택은 2010년 춘천에 자신의 이름을 딴 테니스 아카데미를 열었다. “선수 키우는 일이 쉽지 않다. 외국은 공부와 운동을 병행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후배들의 도전 정신도 줄었다. 국내에서만 뛰어도 먹고살 만하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힘들어도 더 높은 곳을 바라봐야 한다.” 이형택에게는 두 명의 잊을 수 없는 지도자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은사 이종훈 교사와 삼성증권 시절 주원홍 감독(현 대한테니스협회 회장)이다. “내 스타일과 나를 이해해 준 스승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어려서부터 승패에 연연해 꾸짖기보다는 공격적인 스타일로 치면 칭찬을 해주셨다. 장래를 보고 지도해주신 고마운 분들이다.”

그는 최근 US오픈에서 아시아 남자 선수 최초로 메이저 대회 결승에 진출한 일본의 니시코리 게이를 언급했다. “니시코리는 조기 해외 유학과 세계 유명 코치의 지도 등에 힘입어 아시아 선수의 한계를 극복했다. 우리도 배워야 한다. 한국 선수들도 못할 이유는 없다. 정현과 임용규는 나이도 어리고 충분한 자질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언어 구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니시코리의 성공 배경에는 영어 실력도 있다. 나는 그 스트레스가 심했다. 이기면 영어로 인터뷰도 해야 했는데 그 부담 탓에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 억울한 판정에도 항의 한번 못해 손해를 본 적도 많다.” 그가 후배들에게 늘 영어 공부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9년 은퇴한 이형택은 지난해 선수로 복귀했다. 코트에 대한 미련이 남기도 했지만 자신을 뛰어넘을 후계자가 없는 답답한 현실도 영향을 미쳤다. 어린 선수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그들의 성장을 돕고 싶다는 포부도 있다. 이번 아시아경기에도 대표로 뽑혔지만 가슴에 생긴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아 갈비뼈 하나를 7cm 제거하면서 포기했다. “복식 위주로 하다 보니 충분히 할 만하다. 그랜드슬램 대회도 나갈 수 있다고 본다. 아직도 코트에 있을 때가 행복하다.” 2시간 가까운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이형택과 작별의 악수를 했다. 마주 잡은 오른손 손가락 마디마다 콩알 크기의 딱딱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인천에서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테니스#이형택#인천 아시아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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