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맡고 안하기로 결심한 말 “나 땐 이러지 않았다” “이것도 못하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16일 03시 00분


코멘트

[김종석 기자의 스포츠 인생극장]<19>박미희 흥국생명 배구감독

시간의 더께를 보여주고 싶었을까. 장식장에 놓인 수십 개의 트로피는 대부분 빛을 잃고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화려했던 과거는 오히려 아쉬운 현실을 후벼 파고 있는 것 같았다. 퇴색한 영광의 흔적을 유심히 지켜보던 기자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그는 “앞으로 다시 새 걸 채워 넣어야 할 텐데…”라고 했다.

지난주 경기 용인시 기흥구의 여자프로배구 흥국생명 숙소에서 만난 박미희 감독(51)이었다. 1980년대 ‘코트의 여우’라는 별명과 함께 최고 인기 스타였던 박 감독은 지난달 새롭게 흥국생명 지휘봉을 잡았다. 현재 야구 축구 농구 배구 등 국내 4대 프로스포츠에서 여성 감독은 그가 유일하다.

흥국생명은 1971년 동일방직 배구단을 인수해 태광산업으로 창단한 뒤 40년 넘는 오랜 역사를 지녔다. 프로배구에서 한때 3년 연속 우승하며 최강으로 군림했지만 최근 3시즌 동안 6개 구단 가운데 5위→5위→6위로 바닥을 헤맸다. 2008년부터 박 감독 부임 직전까지 6년 동안 사령탑 6명이 교체됐다. 1년에 한 번꼴로 감독이 바뀐 셈이다. 내홍도 끊이지 않았다. TV 해설가로 인정받으며 안정된 삶을 살던 그가 감독 제의를 받아들이겠다는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배구 했던 친구 10명 가운데 8명이 반대했다. 너무 힘든 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의 마음을 돌린 건 가족이었다. 기자로 일하는 남편과 이제는 장성한 20대인 1남 1녀를 둔 박 감독은 “평생을 바친 배구인데 감독은 한번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하더라. 자주 오지 않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아 수락하게 됐다”고 했다.

○ “감독은 性이 없다”

요즘 박 감독은 오전 6시에 출근해 선수들과 아침 식사를 함께하며 일과를 시작한다. “8년째 하루에 몇 경기씩 TV 해설을 해도 끄떡없던 목구멍이 감독 맡고 며칠 만에 아프더라. 의욕만 앞서 선수들 앞에서 말을 너무 많이 했나 보다. 호호.” 그에게는 정상에서 곤두박질치면서 패배의식에 젖어 있는 팀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는 일이 당면 과제다.

“선수들에게 의식적으로라도 목소리를 크게 내라고 주문했다. ‘네’라는 대답을 할 때도 씩씩하게 톤을 높이라고 했다. 평소에 밝게 생활해야 코트도 밝아진다.”

여성 감독이라는 이유로 집중되는 주위의 시선도 부담스럽다. 박 감독보다 앞서 프로팀 여성 감독에 올랐던 배구 조혜정 씨나 농구 이옥자 씨는 계약 기간도 채우지 못한 채 중도하차했다. 이들의 실패에는 국내 스포츠 현장에 여전히 높이기만 남성 위주의 질서도 영향을 미쳤다. 동문과 선후배 의식이 강한 지도자 세계에서 여성 감독은 공공의 적이 되기도 했다. “책임감이 크긴 한데 거기에 치우치면 안 된다. 여성 감독으로 누가 끝을 가본 것도 아니고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다. 여자는 안 될 거란 편견만은 없애야 한다. 조혜정 선배가 그러더라. 두려움 없이 소신껏 해보라고. 어렵지만 해볼 만한 일이다. 감독은 성(性)이 없다.”

○ 자유 원하는 선수들과 밀당 잘해야

1991년 28세로 은퇴할 때까지 박 감독은 포지션에 상관없이 최고의 기량을 펼친 전천후 플레이어였다. 요즘 선수들은 신체조건이나 운동 환경이 예전보다 향상됐어도 자기 역할에만 매달리는 반쪽 선수가 많다. 그런 후배들이 박 감독의 성에 차지 않을 만하다. 하지만 박 감독은 “팀을 맡고 두 가지는 꼭 안 하려고 마음먹었다. 나 때는 이러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이런 것도 못하느냐고 꾸짖는 거다. 기본기와 소통이 중요하다.”

2시간 가까운 인터뷰를 마치고 박 감독과 숙소 식당에서 점심을 했다. 선수 10여 명이 식사 내내 웃고 떠들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가위바위보를 했다. 식판 치우는 당번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운동부의 식당 군기는 군대 못지않게 엄격한 게 일반적이었기에 그들의 밝은 표정이 신선해 보였다. “운동할 때는 아무리 힘들게 해도 코트 밖에서는 자유를 원하는 게 요즘 세대다. 선수들과 밀당(밀고 당기기)을 잘해야 한다.”

○ 운동도 공부도 ‘독종의 대명사’

박 감독은 독종의 대명사였다. 초등학교 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배구를 시작해 어린 나이에 전남 해남에서 광주로 유학을 떠났지만 키가 작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고도 독하게 기본기를 키웠다. 광주여상 2학년 때 대표팀에 선발된 뒤 1981년 세계청소년선수권에서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1983년 미도파에 입단해 백구의 대제전에서 원년 챔피언에 오르며 신인으로 최우수선수까지 됐다. 국내외를 누비던 그는 1980년대 후반 경기 도중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졌다. 왼쪽 무릎을 거의 쓸 수 없는 상태였지만 수술을 하지 않았다. 자칫 선수 생활이 끝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인내와 고통이 수반되는 1년 동안의 길고 외로운 재활 끝에 재기에 성공해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학업에 미련이 남아 고교 졸업 후 6년 만인 1989년 뒤늦게 한양대에 체육 특기생이 아닌 일반학생으로 입학했다. 운동만 하다 만학도가 돼 학점 취득이 쉽지 않았지만 졸업장을 받은 뒤 석사학위까지 땄다. 2000년대 중반 남편을 기러기 아빠로 남겨둔 채 겨울이면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중국 옌볜에서 과학기술대 교수로 배구를 가르치며 두 자녀를 키웠다. 대학체육회의 스포츠외교전문가 과정을 1기로 수료할 만큼 자기계발에도 열성이었다.

시인 손택수는 ‘도끼는 갈고 갈아도 지워지지 않는 묵향을 그리워하며 기꺼이 흙이 된다’(녹슨 도끼의 시)고 했다. 천명을 안다는 오십 줄에 접어든 박 감독은 자신의 삶을 관통하던 독기(毒氣)가 많이 빠진 듯했다. “선수들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 성적에 앞서 사랑받는 팀을 만들고 싶다. 나를 낮춰야 할 것 같다.” 선수의 몸과 마음을 모두 얻어야 한다는 그의 앞날은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되는지 모른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박미희#흥국생명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