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지금이 바닥”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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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석 기자의 스포츠 인생극장]<16>프로농구 삼성 이상민 감독

프로농구 삼성 이상민 감독(42)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쯤 오고 있는가. 옷은 어떻게 입어야 하나.” 공석이던 감독 자리에 13일 전격적으로 선임된 그를 만나러 농구단 숙소가 있는 경기 용인시 삼성트레이닝센터(STC)로 가던 길이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을 떠난 광역버스가 1시간 넘게 달려 경기 성남시 분당 근처를 지날 무렵이었다.

워낙 언론 취재를 많이 받아봤던 그이지만 꼼꼼한 성격답게 이번에도 준비성이 철저해 보였다. 이 감독은 기자와 만났던 날 하루에만 신문, TV 등 7군데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 이성훈 삼성 농구단장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이 감독과 호흡을 맞출 코치에 대한 하마평까지 무성했던 것도 이례적이었다. 현역 시절 9시즌 연속 올스타전 팬 투표 1위에 올랐던 이상민 감독. 당대 최고 인기 스타였던 ‘오빠’는 그렇게 돌아왔다.

○ 2년 정도 코치 더 할 줄 알았는데…

2010년 은퇴 후 미국 연수를 거쳐 지난 2년 동안 삼성 코치였던 이 감독은 “2년 정도 코치를 더 할 줄 알았다. 아직은 지도자로 배울 게 많다”는 말로 말문을 열었다. 초보 사령탑은 목에 힘부터 뺐다.

“내가 KCC 선수 때 허재 형이 감독으로 처음 왔다. 농구 9단이라고 불리던 분이었으니 이상민, 추승균의 플레이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내가 감독님에게 제발 눈높이 좀 낮추라고 했다. 나 역시 그래야 한다.”

지난 정규리그 삼성은 8위의 성적 부진에 빠졌다. 계약 기간 3년 동안 명가 재건의 발판을 마련해야 될 막중한 책임이 그의 어깨를 누르고 있다. “자주 지다 보니 선수들이 패배의식에 젖어 있다.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다. 실패를 두려워 한 나머지 패스나 슈팅을 망설여선 안 된다. 더 내려갈 데도 없으니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

팀워크와 희생정신도 강조하는 부분이다. “오후 11시 이후 숙소 소등이다. 아침 식사는 같이해야 한다. 다른 종목 지도자나 선배에게도 예의를 갖춰야 한다.”

선수 정리 및 보강 등 현안을 풀어가고 있는 이 감독이 구상하는 농구 색깔은 뭘까. “아직 백지 상태다. 다만 빠른 농구를 버리기는 어렵다. 수비도 공격도 모두 강한 팀을 만들겠다고 하면 욕심일까. 만수(萬手·프로농구 최다 우승 보유자인 유재학 모비스 감독의 별명)는 아니더라도 백수(百手)는 돼야 할 텐데….”

○ 부팅 시간이 오래 걸렸던 컴퓨터 가드

1997년 사우디아라비아 아시아선수권 28년 만에 우승,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 20년 만의 금메달, 프로농구 챔피언 3회….

하지만 이 감독이 일찍부터 주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이런 업적을 쌓은 건 아니었다. 그는 서울 성북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83년 농구공을 잡은 뒤 홍익대사범대부속중을 거쳐 홍익대사범대부속고에 진학할 때까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올라갈 때 172cm였다. 또래보다 작아 키 크는 방법이 담긴 책을 탐독할 정도였다. 3개월 내내 당근, 사과, 우유, 정어리만 먹은 적도 있다. 고교 3학년 때 182cm가 됐다. 효과가 있었나 보다. 하하.”

고교 졸업반 때인 1990년 동국대총장배 대회에서 처음 우승을 이끌면서 비로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알렸다. “남보다 신체조건이 좋지 않다고 좌절하지 않았다. 하루도 안 쉬고 운동 참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고교 때 감독님(김진수)이 키가 작았어도 경기에 자주 내보내 주신 덕분에 눈을 떴다.” 연세대 입학 후 최희암 감독과 유재학 코치를 만나면서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철저한 ‘분업 농구’를 배웠다. 문경은 서장훈 우지원 등과 호흡을 맞춰 패스 요령, 전술에 따른 동선 등을 익혔다.”

○ ‘마지막 승부’와 ‘응답하라 1994’ 세대의 귀환

최근 프로농구 코트에는 1990년대 농구대잔치 출신 선수들의 지도자 진출이 두드러진다. 이 감독의 연세대 1년 선배인 문경은 SK 감독(43)이 선두 주자. 동부는 이 감독과 동갑으로 중앙대와 기아에서 뛰었던 김영만 코치를 감독으로 내부 승진시켰다. 이 감독은 유니폼을 벗은 뒤 다시 이들과 우정 어린 대결을 펼치게 된 셈.

이들이 뛰던 시절은 한국 농구의 황금기였다. 이 감독은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당시 농구 열기가 TV 장면보다 훨씬 더 심했다. 신촌 연세대 농구부 숙소에는 한밤중에도 소녀 팬 수백 명이 몰려들어 난리가 났다. 오죽하면 옆집 살던 교수님이 하도 시끄러워 이사를 갔겠는가. 그 바람에 우리 숙소가 넓어졌다. 요즘 아이돌은 밴이라도 타고 다니지만 우린 어디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사생활을 지킨다는 건 생각도 못했다.”

이런 추억을 갖고 있는 그였기에 최근 농구의 인기 하락이 누구보다도 아쉽다. 팬클럽 회원수가 한때 2만 명이 넘었던 이 감독은 지도자로도 확실한 흥행 카드다. ‘영원한 현대맨’으로 불리던 이 감독이 KCC를 떠나 삼성으로 이적했을 때, 본보의 보도로 은퇴 사실이 알려졌을 때 오빠부대는 눈물까지 쏟으며 그의 곁을 지켰다. 이 감독은 요즘도 외출 나가면 어느새 아줌마가 된 팬들의 사인 요청이나 사진 촬영 등에 시달리고(?) 있다. “팀이 어려울 때 응원해줘야 진정한 팬인 것 같다. 힘이 되고 의지가 된 분들을 떠올리며 노력하겠다. 농구장 많이 찾아 달라.”

P.S. 인터뷰 내내 이상민 감독은 무척 신중해 보였다. 프로 스포츠 감독은 모든 걸 혼자 책임져야 하는 고독한 존재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기 때문이었을까. 조심스럽게 첫 발을 뗐기에 그의 앞길은 더욱 주목되는지도 모르겠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이상민#프로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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