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유통]유통업체 "귀하에겐 물건 안팝니다"

  • 입력 2002년 1월 21일 17시 38분


경기 안양시 동안구의 C씨(28)는 지난해 12월 한 인터넷 경매업체에서 영구 제명 당했다. C씨는 이 업체에서 물건을 낙찰 받고도 6차례나 구매하지 않았다. 몇 번 경고성 불이익을 받았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구매 거부를 일삼다 결국 쫓겨난 것.

서울 강동구 천호동의 Y씨(33)도 최근 한 홈쇼핑에서 물건을 사려했으나 거부당했다. 이 홈쇼핑업체가 “반품률이 90% 이상이고 몇 차례 주의를 줬으나 소용이 없었다”며 판매를 거부한 것.

유통시장에서 상품불량 거래자들이 ‘규정’되고 있다. 금융시장의 신용불량자들처럼 말이다. 한국도 미국처럼 상품불량 거래에 대한 제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이용한 고객관리경영(CRM)이 발달하면서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이다.

▽얌체 고객 솎아내기〓새 옷을 며칠 입어보고 반품하는 얌체 고객들은 예전에는 잘 들키지 않았다. 몇 몇 상습적인 고객을 매장 직원의 기억에 의존해 꺼려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컴퓨터의 발달 덕분에 고객별로 쇼핑 행태를 분석하면서 양상은 달라졌다. 어떤 종류의 물건을 며칠 뒤에 반품하는지, 반품 이유가 정당한지 등을 분석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달한 것.

각 유통업체들에 데이터가 쌓이고 분석이 이뤄지면서 ‘문제 고객’을 찾아내 은밀한 제재가 내려지기 시작했다.

유통업태별로 얌체 고객 유형이 약간씩 차이가 있다. 물건을 보고 사는 백화점은 주로 ‘카피족’들로 골머리다. 유명 의류 브랜드의 신상품을 샀다가 며칠 뒤 환불하는 이들로, 유사상품의 본을 뜨는 데 사용한다.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등 ‘흔적’을 남기지 않아 아직도 적발하기 어려운 대표적 유형이다. 또 “유흥업소 여종업원처럼 1∼2주 잘 입고 다시 교환하는 경우나 사은품을 노려 구매하고 환불받는 경우는 흔한 편”이라고 한 백화점 관계자는 밝혔다.

온라인 매장은 얌체 고객들의 주 활동무대다. 입어보거나 직접 보고 살 수 없다는 이유로 현행법은 상품하자와 관계없이 무조건 구매한 지 20일 이내의 반품 요구를 거절할 수 없도록 규정해 놓고 있다.

한 인터넷 쇼핑몰 관계자는 “통상 5% 안팎이 반품되고 의류는 10∼15% 정도로 반품률이 높다”며 “이 가운데 상습 반품족들과 어이없는 불만을 자주 터뜨리는 사람들은 500명 수준으로 요주의 대상”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인터넷 쇼핑몰은 구매 고객의 0.1% 수준을 문제 고객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밝혔다.

홈쇼핑 업체에도 반품률이 70∼80% 수준인 ‘반품족’들이 수두룩하다. 충동 구매했다가 반품하는 고객들이 상당하나 뾰족한 대책은 없는 형편. 한 홈쇼핑 업체 역시 약 2000여명을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았다.

▽제재는 시작됐다〓이제 유통업체들은 참고 있지만은 않는다. 서서히 제재 수위를 높이고 있다. 한 백화점은 올 들어서만 30여명의 불량고객에 대해 자사 카드 사용한도를 크게 낮추거나 정지하는 등 문제 고객에 대해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한 홈쇼핑업체는 고객을 VIP, 일반, 주의 등 3등급으로 나눈 뒤 상위 10% 고객에게는 전담 텔레마케터를 통해 상품 주문 및 사후 관리, 사전 편성, 할인쿠폰이나 오페라 초대권 등을 우선 배정한다. 반면 주의 등급 고객은 ‘전화가 잘 안되거나’ 전문 상담사에게로 전화가 넘겨져 경고하기 시작했다. 일부 업체들은 주의 고객에게는 카탈로그 등을 발송하지 않는 등 접근을 차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 인터넷 경매업체에서는 구매 거부나 직거래 등 제재규정을 일정 횟수 이상 어길 경우 회원 자격이 자동 정지된다.

▽앞으로 제재는 더욱 강화될 듯〓상품거래 불량자들에 대한 제재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현재 이들 불량고객에 대한 정보는 업체들 간에 공유되지 않지만 앞으로는 공유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미국 우편판매업체나 홈쇼핑처럼 한 업체에서 불량고객으로 등록되면 다른 업체에서도 물건을 살 수 없듯이 말이다.

서울대 경영학과 김병도(金炳道) 교수는 “시장점유율 경쟁을 하는 초기에는 불량고객도 고객으로 대우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라면서도 “하지만 이 단계를 지나 이익중심으로 업체들의 전략이 바뀌는 시점부터 불량고객에 대한 퇴출정책이 본격 시작되고 정보 공유를 막는 현재의 법도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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