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호모부커스]책이 된 일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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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출판평론가
표정훈 출판평론가
 일기는 날짜를 따라가며 쓴 개인의 사생활 기록이지만 출간되어 많은 사람이 읽는 작품이 되기도 한다. 문학적 가치가 높은 것은 일기문학으로 분류되며, 사료적 가치를 지닌 일기도 적지 않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16세기 조선 양반 관료의 삶이 생생하게 기록된 유희춘의 ‘미암일기(眉巖日記)’, 좌옹 윤치호가 1883년부터 60년간 한문, 한글, 영어로 쓴 일기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정승 판서 벼슬을 두루 지낸 경산 정원용은 1873년 9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71년간 일기를 썼다. 증손자 위당 정인보가 연희전문학교에 기증한 이 ‘경산일록(經山日錄)’은 국역되어 500쪽 단행본 여섯 권으로 나왔다. 정원용은 헌종이 세상을 떠난 뒤 강화도에서 이원범(철종)을 모셔와 즉위식 책임을 맡았다. 이에 관한 ‘경산일기’의 기록이 실록보다 훨씬 더 상세하다.

 영국 작가 존 파울즈는 1949년부터 42년간 일기를 썼다. 그중 1965년까지 쓴 일기의 주요 부분을 엮어 펴낸 책이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이종인 옮김)이다. 파울즈가 일기를 대하는 자세는 이러했다. ‘엘리자베스는 일기에 자기에 관한 얘기는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녀 얘기를 안 쓸 수가 없다. 다른 것은 배신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일기만은 배신할 수 없다.’

  ‘존 치버의 일기’(박영원 옮김)는 작가가 1982년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 35년간 쓴 일기의 20분의 1 정도를 담았다. 그는 자신의 내밀한 일기를 아들에게만은 보여주었다. 아들 벤저민은 아버지의 일기에서 ‘끔찍하고 추잡하고 도저히 믿기 힘든 이야기들’을 접하고 말았다. 삶의 이면을 아들에게 보여준 치버는 눈물을 흘렸다.

 철학자의 일기로는 비트겐슈타인이 오스트리아 육군 소속으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 기록한 일기를 묶은 ‘전쟁일기’(박술 옮김)가 인상 깊다. ‘신의 은총으로 밤은 무사히 지나갔다. 때때로 공포가 엄습해온다. 이곳은 잘못된 인생관을 가르치는 학교다. 사람들을 이해하라. 그들을 증오하고 싶을 때마다, 대신 그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라. 내적 평화에 의지해 살아라!’(1916년 5월 6일)

 일기는 자기 자신과 대화하며 일상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기회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음미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면 일기는 가장 좋은 음미의 방법이다. 가치 있는 새해 결심으로 일기 쓰기만 한 것도 드물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존 치버의 일기#일기#전쟁일기#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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