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호모부커스]번역문학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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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산한 밤의 천막이/희미시 잠들은 창궁에 드리웠도다…부드러운 달이 크다란 백조와 같이도/은빛 구름 속으로 헤엄쳐 가라./헤엄쳐 가며 그 해쓱한 빛으로/주위의 만상을 비치어라/오랜 보리수 닐닐이 늘어선 길 눈앞에 틔었고/등성이며 풀밭은 환히 바라보이어라….’(‘근대서지’ 제2호)

시인 백석(1912∼1996)이 번역한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쨔르스꼬예 마을에서의 추억’의 일부다. 우리말의 조탁(彫琢)이 번역의 기본임을 보여준다. 백석은 영국 작가 토머스 하디의 ‘테스’, 러시아 시인 푸시킨, 티호노프 등의 시,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을 비롯한 러시아 소설을 번역했다. 북한에서 그는 시인보다는 번역가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1481년에 간행된 ‘두시언해(杜詩諺解)’는 당나라 시인 두보(712∼770)의 작품 전편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주석을 단 우리 역사 최초의 번역시집이다. ‘두시언해’를 통하여 두보의 시는 중국문학과 한국문학 공통의 자산이 되었다. 전란으로 고향에 못 가고 피란살이하던 때 봄 경치를 보며 지은 절구 하나가 ‘두시언해’에서 이렇게 풀이된다.

‘가람이 파라니 새 더욱 희고, 산이 푸르니 꽃 빛이 불붙는 듯하다. 올봄이 보건대는 또 지나가나니, 어느 날이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해인고.’ 최남선은 ‘지귤이향집(枳橘異香集)’에서 이를 시조로 다시 번역했다. ‘강산이 때를 만나 푸른빛이 새로우니, 물가엔 새 더 희고 산에 핀 꽃 불이 붙네. 올봄도 그냥 지낼사, 돌아 언제 갈거나.’

최남선은 “한시와 시조는 향기를 달리하지만 바탕을 한 가지로 하는 매한가지의 문학에 핀 화초”라고 말한다. 지귤은 회수(淮水) 남쪽의 귤을 북쪽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의 고사성어 귤화위지(橘化爲枳)에서 나온 표현으로,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좋은 문학작품은 좋은 번역을 통하여 지역적 고유성을 뛰어넘어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한다.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 ‘수출입 장벽을 낮춰 경제영토를 넓힌다’고 한다. 외국 책을 제대로 번역하여 많이 읽고 우리 책의 좋은 번역이 널리 읽힐수록 언어 간 장벽이 낮아지며 문화영토가 넓어진다. 국문학자 양주동이 90년 전에 말했다. “외국문학을 앎으로써 우리의 문학적 소양을 넓힐 뿐만 아니라 그 섭취한 지식으로 자가(自家)의 독특한 경지를 새로 개척할 수 있다.”(동아일보 1927년 3월 2일자)
 
표정훈 출판평론가
#두시언해#번역#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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