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석의 시간여행]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입학의 문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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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입시경쟁

‘전장(戰場)에 임한 그들의 얼굴에는 모두 큰 불안감이 감돌았다. 괴로운 빛으로 몸을 비틀고 손가락도 잡아 뽑고 애를 쓰는 모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견디지 못하게 한다. 책상 위에는 그들의 병기인 두어 자루의 연필이 날카롭게 깎여 있다.’

95년 전인 1921년의 입학시험장 풍경이다. 수험생의 평균 나이는 열두어 살. 지금의 초등학교 격인 보통학교를 갓 졸업하고 상급학교인 고등보통학교 진학을 꿈꾸는 소년들이었다. 이즈음 서울의 공사립 주요 고보(高普) 9개교의 평균경쟁률은 5 대 1.

‘선전을 포고하는 종소리가 울리자 그들의 눈은 일시에 빛나며, 격렬한 백병전이 일어나고 연필소리만 다각다각 처참히 들릴 뿐이다.’(동아일보 1921년 3월 27일자)

‘비참한 입학시험이 얼마나 어린 사람의 가슴을 태우는지’ 살펴보러 ‘처참한 입학시험’ 현장을 찾았다는 신문기자는 전쟁터의 병사를 묘사하듯 사회면 머리기사에 그렇게 적었다.

시험 과목은 일본어, 조선어 및 한문, 산술. 세 과목 모두 주관식이다. 이들이 입학을 염원하는 학교의 졸업생 역시 같은 처지가 되어 최고 학부의 관문을 뚫는 전쟁을 치른다. 요즘의 대학에 준하는 전문학교 입시도 시험과목이 많고 난도가 높다는 점 외에는 시험 절차와 경쟁률, 그리고 긴장과 공포가 비슷했다. 4월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초봄은 조선의 새싹들에게 잔인한 계절이었다.

초급학교부터 최고 학부까지 각급 학교의 입시전쟁은 1920년 이래 연례행사였다. 철부지 아동이 부모 손을 잡고 처음 학교 문을 밟는 보통학교에서조차 시험으로 입학을 결정짓는 곳이 허다했다. 학교가 태부족이어서다. 3·1운동 직후 개막된 1919년 신학기의 경우 보통학교의 적령아동인구 취학률이 5%도 못 되었다. 기미독립만세를 계기로 시행된 이른바 문화통치 국면에서 보통학교는 급격히 확충돼 1926년에 취학률이 17%를 넘어서고 1935년에 25%에 이른다. 그런데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높아지는 교육열을 학교 수가 따라가지 못해서였다. 학교를 처음 찾는 어린이가 보통학교 고사장에서 선생님의 묻는 말에 머뭇대지 않고 잘 대답하도록 부모에게 지도 요령을 일러주는 기사가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그렇게 입학한 보통학교생이 졸업 후 고보 진학에 성공하는 경우는 극소수였다. 상급학교로 갈수록 학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탓이다. 1935년 고보 재학생은 인구 1000명당 1명꼴이었다. 인구의 80%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문맹인 시절이었다. 대학진학률이 80% 수준이라는 지금과 다르다.

‘해마다 2, 3월이면 초등학교로부터 중등, 전문, 대학에 이르기까지 학원의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는 이들의 시험지옥이 전개되는 시절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어주리니’는 성서에 쓰인 진리라 할 것이지만 암만 두드려도 열릴 줄 모르는 문이 있으니 지금 이 땅의 입학문이다.’(동아일보 1935년 2월 21일자)

1930년대 들어 ‘입시지옥’이라는 말의 사용 빈도가 잦아졌다. 몇 안 되는 최종 학부의 입학난은 그 정점이었다. 국립대학 격으로 문을 연 경성제국대학이 첫 신입생을 받은 1924년부터 대학 입학 경쟁이 뜨거워졌다. 경성법학전문 경성의학전문 등 관공립 전문학교, 연희전문 보성전문 등 사립 전문학교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등교육기관의 좁은 문에 비례해 유학생이 급속히 늘어났다. 국내에서 대학에 입학하기보다 일본 대학에 들어가기가 훨씬 쉽다는 말이 점점 현실이 되어 갔다. “동경 밥값이나 서울 밥값이나 그게 그건데, 동경 가서 공부하지” 하는 말이 형편 되는 집집마다 스스럼없이 나오며 고보마다 대여섯 명씩은 매년 유학을 떠나는 풍조가 1920년부터 눈에 띄게 나타났다. ‘금수저, 은수저’는 요즘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1929년 봄 일본에서 전문학교 이상을 졸업한 유학생은 근 300명이었는데, 국내의 전문대학 이상 졸업생 수에 근접하는 규모였다.

그렇게 형성된 입시제도는 광복 이후 21세기가 되어서까지 이루 다 기억하기조차 힘들 정도의 무수한 변천을 겪었다. 입학시험은 각급 학교별로 분산되어 주기적으로 치러지다가 점점 한 군데로 수렴되었다.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기 전까지는 ‘국민학생이 가장 많이 공부하고 대학생이 가장 적게 공부한다’는 말이 나왔다. 고교입시가 폐지된 뒤로는 입시 압박이 고등학생에게 폭주하는 양태로 바뀌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대학입시다. 그러잖아도 힘든 입학시험을 요동치는 제도 변화에 맞춰 치러 내느라 이중고를 겪어온 이 땅의 수험생들은 납세와 국방의 의무와 더불어 입시의 의무를 하나 더 지고 살아가는 국민처럼 되어 버렸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
#일제강점기#입시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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