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배의 神品名詩]봉선홍경사갈비(奉先弘慶寺碣碑)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17일 03시 00분


코멘트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碣記碑).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碣記碑).
봉선홍경사갈비(奉先弘慶寺碣碑) ―유재영(1948∼)

왕비의 이빨조차 썩지 않는 불멸의 땅
옛 백제의 천안시 서북구 헹겡이벌
고려국 마지막 유민(流民) 멈춰선 듯 돌비 하나
구름 두른 머릿돌엔 비룡(飛龍)이 꿈틀대고
받침돌 당초무늬 덩굴손 뻗은 자리
오른쪽 머리 돌리고 눈 부릅뜬 이무기여
(…)
한때는 임금님도 머물다간 큰 절집
정권은 부패했고 나라는 도탄이다
어쩌다 백성들 원성 여기까지 사무쳤나
대웅전도 아미타불도 다 벗어던졌다
없는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버림받은 자
홀로 서 들판에 우뚝 그들 보러 나왔구나
살육과 화염에도 타지 않는 민중의 혼
위례에서 곰나루 흙비 오는 길을 따라
오늘도 망이 망소이 그 함성을 듣겠네


어버이는 하늘이어라. 만백성 위에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도 어버이께 효도하고 뜻을 받드는 일로부터 충효실천의 본보기가 되었어라. 고려 제8대 현종은 선왕 안종이 불사를 일으켜 착공한 홍경사의 회향을 보지 못하고 승하하자 6년에 걸쳐 200여 칸의 절을 완공하고, 길가는 사람들을 위해 서쪽에 80칸의 객관 ‘광연통화원’을 따로 짓는다. 그리고 어버이의 뜻을 받든다는 뜻을 담아 비석을 세우며 이름을 지어 내리니 ‘봉선홍경사갈기비’라 하였다.

이 비석의 글은 해동공자라 일컫는 고려의 대석학 최충이 짓고 글씨 또한 고려 제일의 명필 백현례가 썼다. 현종 17년(1026년)에 세워진 이 비석은 오른쪽으로 머리를 치켜든 용머리 거북이 지느러미를 펼치고 네 발로 일어서려는 몸짓 위에 구양순체 선명한 비신이 있고, 비신은 구름 속에 날아오르는 용을 머리에 이고 있다. 높이 2.8m의 장대한 키에, 문장으로나 글씨로나 형태로나 우리나라 사적비로서 첫손가락에 꼽힌다. 국보 제7호.

이규보가 ‘동문선’에 1000여 개의 등이 밤을 밝혔다는 절은 망이·망소이의 난에 소실되어 탑 조각들만 뒹구는 빈터에 비각만이 고려의 융성과 어버이를 받드는 효성을 지키고 있다.

시인은 ‘없는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버림받은 자/홀로 서 들판에 우뚝 그들 보러 나왔구나’며 아직도 들끓는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있구나.

이근배 시인·신성대 교수
#봉선홍경사갈비#유재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