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사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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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을 넘긴 시누이가 보따리 하나를 가져왔다. 보따리 속에는 저마다 다른 종이들이 들어 있었다. 좋은 말을 들을 때마다 적어 두거나 책이나 신문에서 읽은 것을 베끼기도 해서 오랫동안 모은 글이라고 했다. 혼자 보기 아까운 글을 아주 작은 책자로 만들어 주변 사람과 나누고 싶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시도 때도 없이 카카오톡이나 문자메시지로 전해 오는 좋은 말 시리즈에 반감을 갖고 있던 참인 데다 두서없는 원본을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깜빡 잊고 지내고 있는데 조심스럽게 다시 전화가 왔다.

“많이 바쁘지? ‘사랑모임’ 총회에서 나눠주려고 하는데 그때까지 시간을 대지 못하면 만들 필요가 없긴 한데….”

시누이는 23년 동안 매달 5000원 혹은 1만 원씩 내서 불우이웃을 돕는 ‘사랑모임’을 이끌어오고 있는데, 오랜 세월 뜻을 같이해준 회원 150명에게 마음의 선물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비상이 걸렸다. 삐뚤빼뚤 글씨를 컴퓨터에 입력하여 편집을 하고 멋을 좀 부려서 후다닥 수첩 크기의 예쁜 책자를 만들었다.

“내가 죽으면 좋아서 죽은 줄 알게.”

오랫동안 모아온 글이 책이 되어 나온 걸 보고 정말 행복하다는 표현이었다. 그 후 계속해서 그 책자를 받은 주변의 반응을 전하며 즐거워하는 시누이를 보면서 사는 이유에 대한 생각을 했다.

‘버킷 리스트’라는 영화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의 목록을 만들어 하나하나 실천해가는 이야기다. 그런데 영화 속 주인공처럼 시한부 인생일 때만 버킷 리스트가 필요할까. 우리 모두 날짜만 모를 뿐, 시한부 인생이 아닌 사람은 없는데 말이다.

버킷 리스트야말로 강력한 삶의 의지 같다.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을 하려면 죽을 만큼 힘들어도 살아 있어야만 가능하다. 신문에서 자살 뉴스를 접하면 얼마나 힘들면 자살을 선택했을까 마음이 짠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에게 버킷 리스트가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싶어서다.

평생 성실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남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는 시누이에게는 아마 좋은 글 모음집이 버킷 리스트 가운데 하나였을지 모른다. 나 역시 이번 일을 통하여 아무 의미 없이 나이를 먹지 않고 스스로 사는 이유를 만들어가며 사는 것, 그것이 오늘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도 새벽에 깨어 나의 버킷 리스트는 무엇인가 곰곰 생각해보았다. 막상 정말 해보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제부터 열 가지만 적어보려고 한다.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 그것이 지금부터 내가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될 테니 말이다.

윤세영 수필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버킷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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