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엄마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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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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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전화가 걸려온 것은 2011년 3월 11일 새벽이었다.

“세영아, 엄마 돌아가셨다.”

누구나 그런 전화를 받았거나 받게 되겠지만, 2년이 된 지금도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혼자 되뇌어보곤 한다. “엄마가 돌아가셨다.” 소리 내어 중얼거려 봐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엄마는 참 특별했다.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았던 약골인 딸이 불면 날까, 쥐면 꺼질세라 온 정성을 다하셨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에는 보온 도시락이 없었다. 엄마는 따뜻한 밥을 먹어야 건강하다며 도시락을 싸들고 점심시간에 딱 맞추어 교실로 찾아오곤 했다. 자식에게 찬밥을 먹이면 큰일 나는 줄 알던 엄마였다.

고등학생이 돼 책가방이 무거워지자 매일 아침 버스 정거장까지 내 책가방을 들고 따라나섰다. 창피하다고 뿌리치고 볼멘소리를 해도 막무가내였다. 방과 후 버스에서 내리면 어김없이 기다리고 계셨다. 교복 입은 여고생이 책가방을 든 엄마 뒤를 줄레줄레 따라가는 모습이 내가 생각해도 가관이어서 화를 내봐야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동네사람들이 “오늘도 따님 마중 나갔다 오시나 봐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우면서 “우리 딸이랑 걷는 게 즐거워서요”라고 대답했다.

미당 서정주 선생은 ‘자화상’이란 시에서 “나를 키운 팔 할은 바람이었다”고 노래했지만, 나를 키운 구 할은 엄마의 사랑이었다. 딸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 내 딸이 최고라는 엄마의 믿음이 나를 키운 자양분이었다. 부모로부터 100%의 신뢰를 받아본 경험은 평생 나의 버팀목이 되었다. 절대적인 엄마의 믿음을 어떻게 저버릴 수 있을까.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내게 헌신했지만, 나는 그런 엄마가 되지 못했다. 외할머니 손에 자란 나의 두 아이는 외할머니가 엄마 같았고 엄마는 선생님 같았다고 말한다. 그저 믿어주고 기다려 주면 그뿐인 것을, 나는 섣부른 교육관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들었던 것이다. 사실 초등학교 학력의 엄마는 내게 지식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세상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법을 알게 하셨다.

엊그제 엄마 산소에 다녀왔다. 이제는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고 믿어주던 엄마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네가 내 딸이어서 행복하다고, 네가 최고라고 말해주던 엄마에게 비로소 그 말을 돌려드린다. 엄마야말로 세상에서 최고의 엄마였다고 말이다.

오늘은 유난히 엄마가 살아계신 사람들이 부럽고 질투가 나는 날이다. 아직 ‘두려운 전화’를 받지 않은 복 많은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엄마가 살아계신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 이 봄에 엄마랑 꽃구경 나서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껏 이야기를 나누고 맛있는 거 사먹고 서로 최고라고 칭찬하면서 말이다. 엄마가 그립다.

윤세영 수필가
#엄마#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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