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노래 대신 시를 외워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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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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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음주가무 없이 사회생활하기는 쉽지 않다. 지금은 덜하지만 한때 밥 먹고 술 마시고 나면 노래방 가는 게 코스였던 그 시절에 우리 부부는 참으로 난감했다. 못한다고 사양하면 할수록 기어이 노래를 시키고야 마는 짓궂은 심보에 시달린 것이다.

견디다 못해 노래 한 곡을 완벽하게 마스터하기로 결심했다. 그때 도전한 곡이 ‘옛 시인의 노래’였다. 음반을 듣는 것으로는 학습효과가 미미해서 아예 악보를 사다가 피아노로 정확한 음정을 익히고, 그 다음에는 노래방에 가서 한 시간 내내 그 한 곡만 연습했다. 이런 노력 끝에 그 노래만큼은 남들 앞에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10여 년째 같은 노래만 부른다고, 떠들썩하고 신나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노래를 부른다고 타박을 받던 와중에 다행히 노래방이 시들해져서 그럭저럭 노래 부를 일 없이 편하게 산다. 동시에 노래를 대신할 묘안을 짜냈다. 시(詩) 암송이다.

나는 시를 좋아하지만 바쁘게 직장 생활을 해 온 대한민국 남자들은 시를 접해볼 여유가 있었을 리 없다. 노래 한 곡 제대로 부르지 못해 쩔쩔매는 나를 위해 남편이 악보까지 구해다주며 나섰듯이 나도 남편을 붙잡고 짧고 쉬운 시부터 외우자고 했다. 기억력이 좋은 편이지만 워낙 시와 친해본 적이 없으니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잠들기 전이나 아침에 일어나서, 혹은 운전을 해서 먼 곳을 갈 때 틈틈이 시를 외웠다. 마치 수험생 공부 시키듯이 남편은 시를 외우고 나는 옆에서 맞나 틀리나 확인했다. 잘 외워지지 않아 지루해하는 눈치면 고은 시인의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보지 못한/그 꽃’같이 세 줄로 끝나는 짤막한 시를 내밀었다.

요즘에는 모임에서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면 남편은 시를 외운다. 즐겨 암송하는 시는 정호승 시인의 ‘봄길’과 마종기 시인의 ‘우화의 강’이다. 특히 ‘우화의 강’은 시가 몹시 길어서 사람들이 “그렇게 긴 시를 어떻게 외우냐”고 감탄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를 외우다가 가끔 한 줄 빼먹어도, 남편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신만 가만히 있으면 남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기가 막힌 것은 “아∼, 이렇게 시를 많이 아시니까 윤세영 씨가 반했군요”라는 말을 들을 때다. 난 그냥 웃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반응이 좋으니 남편은 시에 열성을 보이기 시작해서 이제는 나보다 훨씬 많은 시를 외운다. 음주가무 자리에서도 더이상 기죽지 않게 되었다. 자리를 파할 때쯤 그 모임에 어울리는 시 한 수를 암송하면 박수가 쏟아진다.

굳이 그런 걸 떠나서도 좋은 시 몇 편쯤 가슴에 담고 사는 일, 멋지다. 시를 알면 세상이 시로 보인다. 봄눈이 내리면 유금옥 시인의 ‘춘설’이, 동백을 보면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라는 시가 저절로 떠올라 맑고 겸허해진다. 우리 부부처럼 노래에 자신 없는 분들은 시에 기대기를 제안한다.

윤세영
#노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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