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달콤쌉싸름한 철학]아버지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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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몸과 함께 사라지는 그러저러한 환영이 아니라 빛으로 충만한 하느님 자신이라지요? ‘티베트 사자의 서’의 생각입니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 따르면 우리는 그 마음에 끌려 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마음이 사랑한 여자의 자궁에서 아들이 되었고, 그 여자의 남자에 끌려 딸이 되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내 마음이 징하게 사랑하고 증오한 나의 전생입니다.

최근 방송인 이숙영 씨가 자신의 아버지가 가꾼 정원으로 몇몇 지인들을 초대했습니다. 텃밭보다는 꽃밭이 넓은 정원에서 눈웃음이 자연스러운 아버지를 뵈니 내 아버지가 겹쳐지네요. 그 아버지가 어떤 태도로 살아왔는지 알 것 같습니다. 멋이 중요한 낙천적 로맨티시스트! 이숙영 씨는 젊은날에는 늘 바깥으로만 도는 아버지가 못마땅해서 미워했는데,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가 한 인간으로서, 남자로서 이해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이해하면서 아버지를 닮은 아버지의 딸인 것이 좋다네요.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를 이해하십니까?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리지요?

내 아버지 돌아가신 지 10년, 문득문득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슬프게도 그건 아버지 살아생전엔 아버지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좋아했던 나는 어머니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아버지를 보고, 평가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바깥으로만 돌며 자기 좋은 것밖에 모르는 무책임한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모든 것을 주며 걸며 희생적으로 살아온 어머니를 빼고 보면 어머니가 말하는 무책임의 이면이 보입니다. 그것은 낙천성이었고, 자유였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모든 것을 걸었으나 아버지는 아이들은 하느님이 키우신다며 무조건 놓아주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서는 한 번도 공부하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며 사는 일을 존재이유라 믿고 있는 어머니와 일을 핑계로도 바꿀 수 없는 그 어떤 가치가 있다고 믿은 아버지, 선악이 중요한 어머니와 그 경직성을 좋아하지 않은 아버지, 안정이 중요한 어머니와 자유가 중요한 아버지 사이에서 나는 ‘훔쳐가는 노래’의 진은영 시인의 말처럼 “소중한 것을 전부 팔아서 하찮은 것을 마련하는 어리석은 습관”이 있는 자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살아 계신가요? 아버지를 자존감이 중요한 황혼기의 한 남자로서 진심으로 이해해 보신 적이 있나요? 아버지를 ‘아버지’라는 틀 속에 가둬 놓은 채 기대하거나 요구하거나 했던 어린 날들의 생각을 접어보면 아버지의 꿈이 보이고 사랑이 보이고 좌절이 보이고 두려움이 보입니다. 이상하지요? 나는 아버지를 이해했을 뿐인데 사랑하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인 것이.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나 자신이 결박해 놓거나 금지해 놓은 것 속에는 결코 하찮다 할 수 없는 하찮은 경험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고 나니 알겠습니다. 내가 왜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는지. 당신이 왜 어머니의 아들 혹은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을까요? 나는 생각합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머니,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서, 여인으로서, 남자로서 이해하는 거라고. 이해하게 되면 관대해지고, 관대해진 만큼 자유로워지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파울루 코엘류가 그랬습니다. 나 자신을 관대하게 풀어주는 일이야말로 인류 전체를 관대하게 풀어주는 일이라고.

부모는 참 희한합니다. 아무것도 가르치려 들지 않아도 죽어서도 스승이니까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하면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꿈이 일어나 춤을 춥니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제사는 나 자신과의 교감이기도 합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이주향의 달콤쌉싸름한 철학. 철학#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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