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민주당, 보수 양당체제로 경쟁하라

  • 입력 2008년 4월 29일 02시 58분


4·9총선 이후 통합민주당의 진로에 대한 처방이 쏟아지고 있다. ‘중도개혁’으로 가야 한다느니, ‘실용진보’를 표방해야 한다느니, 가히 백화제방이다. 그럼에도 딱히 이거다 싶은 것은 안 보인다. 구호와 수사(修辭)만 가득한 느낌이다. 그것도 언필칭 ‘진보’ 일색이어서 민주당이 과연 대선과 총선 참패의 의미를 제대로 짚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단언컨대 지금 민주당이란 환자(患者)에게 진보라는 약(藥)을 지어주는 것은 바른 처방이 아니다. 자칫하면 영원히 병석에서 못 일어나게 될 수도 있다. 일부 지식인들은 민주당의 선거 참패가 “진보의 정체성을 선명히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앞으로 진보노선을 더 강화하라”고 주문한다. 현실을 모르는 관념적이고 도식적인 주문이다.

그들에게 한번 물어보자. 지난 선거에서 상대적으로 순정(純正) 진보였던 민노당을 닮지 못해 민주당이 참패했는가. 이제라도 민노당을 따라가면 국민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고 보는가. 혹자는 “보수와 차별화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면서 ‘짝퉁 한나라당’으로는 미래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짝퉁 민노당’이라야 미래가 있다는 말인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실용진보’를 하자는 것이라고 강변하겠지만 말장난처럼 들린다. ‘실용’이 곧 보수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를 ‘진보’ 앞에 놓을 수 있는지도 의문이거니와, 그렇게 해서 나온 내용도 보수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이들은 “앞으로 진보는 평등과 자유, 분배와 성장의 균형을 추구하고 안보, 효율, 생산성 등과 같은 보수적 가치들까지도 의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정도의 진보라면 굳이 진보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

‘짝퉁 민노당’이 되라는 것인가

1955년 9월 창당된 민주당은 원래 정통 보수야당(保守野黨)으로 출발했다. 한민당을 뿌리로 둔 탓도 있어서 한 번도 진보(좌파)를 표방한 적이 없다. 심지어는 이승만의 자유당보다도 훨씬 보수적이었다. 자유당은 ‘귀천의 계급 타파와 독점경제 패자들의 착취 배격’까지 강령에 담았지만 민주당의 정강정책은 어디에도 그런 내용이 없었다.

민주당의 보수 순혈주의가 깨진 것은 1987년 김영삼(YS) 김대중(DJ)의 결별과 1990년 3당 합당에서 비롯됐다. DJ는 그 빈자리를 재야(在野) 인사들로 메웠고 1997년 대선 때는 극우인 김종필(JP)과 손을 잡아 세(勢)를 불렸다. 그 덕에 대권을 잡았지만 민주당은 정체성 상실의 긴 터널로 내몰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민주당의 이런 행로는 시대변화에 따라 당의 외연을 확대해 나간 결과인가, 아니면 한 개인의 권력욕이 빚어낸 정당정치의 왜곡인가.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지금 이 순간, 진보도 보수도 아닌 ‘잡탕정당’이 민주당의 본모습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정당에 우리는 어떤 정체성의 회복을 주문할 수 있을까. 진보가 답이 아니라면 다른 대안이라도 있는가.

통합민주당이 민주당을 계승한 이상 당당히 보수를 선언하고 보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경쟁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창당정신에도 부합할뿐더러 지금의 정치적 곤경에서 벗어나는 첩경이다. 공허한 진보 타령이나 늘어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 내부에선 ‘중도개혁’에 합의했다고 하지만 어딘지 노무현 정권의 냄새가 난다.

민주당은 보수정당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가, 아니다. 한미동맹의 가치를 부정하는가, 아니다. 주한미군의 철수를 지지하는가, 아니다. 민주당이 보수야당이 아니라는 어떤 증거도 없다. 53년 전 반(反)독재와 민주주의의 발전, 대의정치와 내각책임제의 구현, 자유경쟁원칙하에서의 생산의 증가, 사회정의에 입각한 공정한 분배로써 국민경제의 발전 등을 내걸었던 민주당의 창당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진보라는 ‘위선의 탈’ 벗어야

그 계승과 발전에 통합민주당의 미래가 걸려 있다. 보수의 아류(亞流)가 되라는 말이냐고? 그렇지 않다.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도 넓은 의미에서 보수라는 공유된 토대 위에서 경쟁하지만 누구도 누구를 가리켜 아류라고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가치관과 이념이 비슷한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가 안정된다. 눈을 씻고 봐도 같은 점이라곤 한 군데도 없는 사람들끼리 무슨 정치를 하겠는가. 대화와 타협은커녕 대결의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민주당이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이 시기가 역설적으로 한국정치의 구조와 체질을 바꾸는 호기(好機)가 되기를 바란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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