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대통령의 실용, 국민의 실용

  • 입력 2008년 2월 18일 22시 13분


“직업훈련소에서 무료로 6개월가량 용접을 배우고 현장에 투입되면 곧바로 월 100만 원에서 150만 원은 거뜬히 받습니다. 그런데도 훈련소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조선업을 하는 한 선배에게서 이런 얘기를 듣고 적이 놀랐다. 3D업종 기피야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이건 좀 심했다. 마침 휴가 중이어서 바람도 쐴 겸 현장에 가 보기로 했다.

목포 삽진산업단지에 위치한 C&(씨앤)중공업에 도착한 것은 오후 세 시가 넘어서였다. 신안군 압해도가 마주 보이는 서남해의 끝자락, 그곳에서도 ‘정주영의 신화’는 재현되고 있었다. 바다를 메우고, 공장을 짓고, 선박을 만드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1500여 명의 인력이 이 조선소의 첫 배가 될 8만1000t급 화물선(길이 230m) 건조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용접사 김두천(44) 배형석(49) 씨를 만났다. 김 씨는 전남 고흥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광양제철에서 용접을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삼천포 화력발전소 등에서 일하다가 광양제철 정사원이 돼 보려고 순천 직업훈련소에서 1년간 국비로 용접 공부를 다시 하기도 했다. 연봉이 6000만 원은 된다는 그는 올해 아들이 교육대학에 합격했다며 웃었다.

배 씨는 외환위기 직후인 2000년 인근 삼호중공업의 사내교육원에서 처음으로 용접을 배웠다. 6개월 무료교육을 마치고 첫 달에 150만 원을 받았다.

용접사를 꿈꿔본 적 있나

지금은 연봉이 5000만 원 선이라는 그는 “개인 차이가 있긴 해도 누구든 현장에서 2년 정도 열심히 하면 연봉 3000만 원은 받는다”고 말했다. 배 씨도 아들이 해양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라고 했다.

두 사람 모두 용접에 뛰어든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용접사는 대부분 비정규직이어서 노동의 안정성이나 복지환경은 여전히 열악하지만 “남한테 아쉬운 소리는 하지 않고 산다”고 했다. 일자리가 없는 남자는 물론 20∼40대 여자들도 용접을 배우게 하면 좋을 것이라는 제안도 했다. 요즘은 손 대신 장비를 이용하기 때문에 여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씨는 자신의 팀에만 세 명의 아줌마 용접사가 있다고 했다.

우리 주위는 어떨까. 용접 일을 배우겠다고 나설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목포지역만 해도 한국폴리텍 목포캠퍼스가 산업자원부의 지원을 받아 매년 700여 명의 용접사 지망생을 뽑아 3개월 코스로 가르치고 있지만 지원자가 많지 않다. 전남도가 2004년 이 지역 일대를 ‘조선 클러스터’로 지정한 이후 늘긴 했지만 훈련소 입소 경쟁률은 1 대 1이 조금 넘을 정도라고 한다. 그나마 대학 졸업자는 거의 없다.

조선업의 전례 없는 호황으로 용접사 수요는 급증하고 있다. 목포대의 박종환(조선공학) 교수는 세계적인 조선업 리서치회사 클라크슨의 보고서를 인용해 “2010년까지 호황이 계속되고, 이후 주춤했다가 2014, 2015년에 다시 호황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런데도 “용접사를 비롯한 조선 인력의 부족과 중소형조선업에 대한 정부의 소극적인 지원으로 중국 좋은 일만 시키게 될 것 같다”고 걱정했다. 실제로 C&중공업은 부족한 용접사를 충원하기 위해 지난달 중국과 미얀마에 현지인을 대상으로 용접사 양성소까지 세웠다.

목포에서 승용차로 20분 정도 남쪽으로 가면 전봇대로 일약 유명해진 대불산업단지가 나온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선박 건조용 블록 운송에 지장을 주는 단지 안 도로변의 전봇대를 규제와 무사안일의 상징으로 보았다.

‘實用의 인프라’부터 깔아야

전봇대는 즉시 뽑혀 나갔고, 그 빈자리에서 우리는 실천, 실질, 성과, 행동으로 집약되는 새 정부의 실용(實用)을 잠시 보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호황인데도 용접사가 부족해 외국에서 데려와야 하는 나라, 청년 실업자가 넘쳐나지만 어느 젊은이도 선뜻 용접 같은 일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는 현실을 그냥 놔두고 실용을 외친들 무슨 힘을 받겠는가.

실용이 뿌리내리려면 국민의 의식 속에 ‘실용의 인프라’부터 깔아야 한다. 직업에 대한 편견, 체면, 학벌, 허례허식부터 지워지도록 해야 한다. 용접보다 더 궂은 일도 누구든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라는 얘기다. 그러려면 교육 취업 임금에 이르기까지 제도적으로 손을 봐야 한다. 대통령의 실용이 밑바닥 실용으로 이어져야만 성공할 수 있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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