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김장수의 ‘의도된 무례’

  • 입력 2007년 10월 29일 20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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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 일간지가 김장수 국방부 장관을 ‘금주의 인물’로 뽑았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비롯한 안보 논쟁에서 소신을 지켰고 평양 남북 정상회담 때는 꼿꼿한 자세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를 해 “68만 군의 수장으로서 권위를 지켰다”는 것이 선정 이유다.

공감한다. 김 장관이 있어서 그나마 이 정권이 임기 말 대북정책의 완급을 조절할 수 있게 됐다. 그가 NLL 사수(死守)를 선언했기에 군이 한목소리를 내고, 그 힘이 노무현 대통령과 대북 유화파의 ‘위험한 안보 도박’을 막고 있다. 문민 우위의 원칙이 훼손됐다고 할지 모르나 평양 정상회담 이후 국민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있는 것은 군인 듯싶다.

10·4공동성명에 따라 남북은 다음 달 평양에서 국방장관회담을, 서울에서 총리회담을 열기로 돼 있다. 총리회담 날짜는 14∼16일로 잡혔지만 국방장관회담은 아직 북에서 아무런 얘기가 없다. 총리회담이야 경협이 주된 의제여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국방장관회담도 북으로선 NLL 재(再)설정 논의의 첫발을 뗄 절호의 기회일 텐데 왜 미적거릴까. 우리 군의 이런 단합된 모습이 북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군의 NLL 사수 의지가 워낙 확고해 북이 회담에서 별로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분석한다. 하긴 회담 수석대표인 김 장관이 김 위원장 앞에서 고개조차 숙이지 않았으니 북이 그런 사람과의 회담에서 뭘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한목소리로 北에 경고한 軍

형식논리로만 따진다면 김 장관의 꼿꼿함이 반드시 적절했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견해도 있다. 싫든 좋든 정상회담은 양측의 최고 통치자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만나는 자리다. 따라서 국방장관도 가벼운 목례 정도로 예의를 갖추는 편이 옳았다는 것이다. 거꾸로 서울에서 회담이 열릴 경우 북의 인민무력부장도 같은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런 논리가 바로 맹목적인 대북 유화책의 소산이다. 여기에 넘어가 지난 10년간 우리는 북이 무슨 짓을 해도 대꾸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살았다. 천문학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돌아온 것은 핵실험과 미사일 위협뿐이다. 이제 그것도 부족해 북 인민무력부장의 결례까지 미리 걱정해야 하나.

김 장관의 ‘꼿꼿한 자세’는 북의 회담 전술로 보면 이른바 ‘의도된 무례’다. 북은 회담을 자신들의 페이스대로 끌고 가기 위해 이 방법을 즐겨 쓴다. 일정을 돌연 취소하거나, 절차를 무시하거나, 억지 주장을 하는 것들이 그런 예다. 고의로 무례를 범함으로써 상대방의 기를 꺾어 놓는 것이다. 북과의 회담 경험이 없는 사람일수록 쉽게 말려든다.

평양 회담 때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에게 하루 더 묵어 갈 것을 권유하면서 “대통령이 그것도 결정 못 하느냐”고 한 것도 전형적인 ‘의도된 무례’다. 정상 국가의 지도자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비례(非禮)지만 북은 그렇다. 오죽했으면 노 대통령이 “처음에는 (김 위원장이) 군기 좀 잡으려 합디다”라고 실토했을까.

2월 27일 평양 제20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북측 대표단장 권호웅 내각참사가 회담이 시작되자마자 이재정 통일부 장관에게 “상반기 안에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라”고 겁박한 것도 마찬가지다. 4월 19일 제13차 경제협력추진위 회의에서 북이 회의 개최 20분 전에 갑자기 “식량차관 제공 합의서부터 교환해야 한다”고 을러댄 것도 같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남북 대화 반세기를 뒤돌아보면 곳곳에서 북의 ‘의도된 무례’를 목격할 수 있다.

NLL, 차기 정권에 넘기는 게 순리

김 장관은 이런 북에 멋지게 한 방을 먹인 셈이다. 북의 무례를 무례로 되갚았다고나 할까. 근래에 없던 일이어서 국민이 속이 다 후련했을 것이다. 크고 작은 일로 북에 그렇게 당했지만 누구 한 사람 나서서 얼굴을 붉혀 본 적이 있던가.

김 장관의 소신과 당당한 자세 덕분에 국방장관회담에서 NLL 같은 중요한 안보문제가 국익에 어긋나게 졸속 처리될 우려는 그만큼 줄었다. 다행스럽다. 애초 실질임기를 두 달도 안 남긴 정권이 이 문제를 매듭짓겠다고 나선 것부터가 무리였다.

다음 달 회담이 예정대로 열린다면 경협과 교류 확대에 필요한 군사적 보장조치를 주로 논의하고 NLL은 다음 정권으로 넘기는 것이 순리다. 김 장관이 그럴 구실을 준 셈이니 노 대통령부터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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