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박정훈]트럼프의 복수극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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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혼네(本音)는 본심을 뜻하는 일본어다. 일본인은 본심을 감추고 남을 대하는 경향이 있다. 두 마음이 혼재해 본인들도 헷갈릴 정도라고 한다.

미국 백인에게도 혼네가 있다. 친절한 미소를 그대로 믿어선 안 된다. 특히 유색 인종에 대한 속마음은 ‘혐오’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노래가 미국에도 있었다면 백인들 사이에 인기를 얻었을지 모른다.

불만의 본질은 유색 인종의 무임승차다. 흑인 대통령은 지난 7년간 불법 이민에 관대했고, 유색 인종 보호에 엄청난 세금을 썼다. 세계 평화 유지에 우리 돈으로 연간 700조 원 가까이 쓰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테러 위협에 떨고 있는 현실이 한심해졌다.

“굴러온 돌이 어디서…”라는 말은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쌓여온 불만은 복수심으로 자랐다. 미국 인구 3억800만 명 중 백인은 63.7%다. 유색 인종이 계속 늘어 2060년에는 절반 이하(49.3%)로 줄어든다고 한다. 그 위기감은 바이러스처럼 번졌다.

복수는 인간에게 친숙한 감정이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고 싶은 법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 천박함을 감추고 산다. 배울수록 더 그렇다. 차별(discrimination)을 금기시해 온 미국 교육의 힘은 ‘복수심의 정치화’를 막아왔다. 그게 다인종 국가인 미국을 세계 최강으로 만든 힘이다.

하지만 대선과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이 상황을 바꿨다. 트럼프의 인기는 불만이 가득 찬 일부 백인의 복수심을 먹고 자랐다. 생방송에서 “개××”라고 말한 트럼프의 용기는 속마음을 가리던 포장지를 걷어냈다. 그는 백인이 불합리하다고 여겨 온 모든 것을 적으로 규정했다.

트럼프의 공약은 ‘복수지침서’에 가깝다. 복지제도를 대대적으로 손봐 소수 인종에게 백인식 정의가 어떤 건지를 맛보여줄 기세다. 모든 이슬람교도의 입국을 막고, 멕시코 돈으로 국경에 장벽까지 쌓자는 건 창의적이기까지 하다.

적잖은 백인들이 사이비 종교 지도자로 보이는 트럼프를 메시아로 여긴다. 그들 눈에는 유일하게 정의를 말하는 정치인이다. 유색 인종의 표를 ‘껌값’ 취급하는 데도 열광한다. 쉬 멎을 줄 알았던 환호성이 그치지 않는 이유다.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는 건 이제 시간문제처럼 보인다.

트럼프의 막말에 지지자는 분이 풀리지만 유색 인종은 상처받고 있다. 미국 시민이라는 자존감도 훼손됐고, 국호에 적힌 ‘United(통합)’의 가치도 난도질당하고 있다. 트럼프가 주장한 안보 무임승차론 탓에 한국과 같은 동맹국과도 이제 남남이 될 판이다. 그에게서 히틀러의 광기를 떠올리는 것도 그런 이유다.

잠깐 로마로 가보자.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가장 큰 힘을 ‘개방과 관용’으로 꼽았다. 이민족의 다름을 받아들인 게 번영의 원천이었다는 거다. 로마가 망한 것도 ‘이교도에 대한 배척’에서 시작됐다고 본다. 로마 시민이라는 동질감이 깨지면서 갈등의 비용을 치른 결과라는 것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고 복수가 완성될 리 없다. 내뱉은 말을 지킨다, 안 지킨다, 좌충우돌하다 그릇만 깨기 십상이다. 복수를 한다고 쳐도 또 다른 복수를 낳기 마련이다. 국제적 갈등으로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 역시 온전할 리 없다.

‘장난치다 애 밴다’는 말이 있다. 시원한 맛에 박수를 쳤지만 이제 냉정해져야 한다. 트럼프가 세계 최강 미국의 대통령이 된다면, 강대국 흥망성쇠 역사에 또 다른 한 페이지로 올라올 것이다.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sunshade@donga.com
#트럼프#미국#대선#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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