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유네스코 첫 여성 사무총장 이리나 보코바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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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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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보존 사이 갈등은 당연… 한국 문화유산보호 높이 평가”

묻자 “한국 사람들이 예상보다 훨씬 활기차고 자유로운 것에 ‘기분 좋게’ 놀랐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묻자 “한국 사람들이 예상보다 훨씬 활기차고 자유로운 것에 ‘기분 좋게’ 놀랐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의 이리나 보코바 사무총장(58)은 세계에서 가장 바쁜 리더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유네스코가 명칭 그대로 교육과 과학, 문화 분야를 포괄하다 보니 사무총장 업무와 관련 없는 이슈는 찾기 어려울 정도. 유네스코 본부가 있는 프랑스 파리에서부터 아랍, 아프리카, 아시아까지 이르는 해외순방 일정 역시 숨찰 만큼 빡빡하다. 보코바 사무총장이 올해 한국의 유네스코 가입 60주년을 맞아 취임 후 처음으로 22일 한국을 찾았다. 그는 지난해 잠깐 한국을 찾아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3박 4일간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개회식’ 참석, 생물다양성의 날 기념행사 참석 등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24일에는 이화여대에서 명예정치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한번 소실된 유산 완전복구 힘들어
저개발 - 개도국서 파괴 행위 잦아


獨 엘베계곡 문화유산 지정취소는
안타깝지만 큰 교훈으로 삼아야


그는 “유네스코가 하는 일의 중요성에 비해 그 역할이나 존재가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못했다”며 연방 아쉬움을 나타냈다. “문화유산 보존 같은 유네스코의 활동은 인류 전체의 보편적 가치를 위한 것”이라며 “이를 확대하는 데 한국 사회는 물론 동아일보와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방한 첫날인 22일 밤 그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만났다.

―한국이 유네스코 가입 60주년을 맞는다. 지금까지 문화유산 보호 등에 대한 한국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급속한 경제성장 속에 전통문화를 잃어버렸다는 평가도 있는데….

“솔직히 한국을 잘 안다고는 못하겠다. 지난해 짧았던 첫 방한 이후 이번이 겨우 두 번째다. 물론 (나의 국적인) 불가리아의 절인 야채와 매우 비슷한 김치를 좋아하기는 한다(웃음). 고려청자와 같은 한국 도자기에도 관심이 많다. 경제발전을 위한 개발과 문화유산 보호 사이의 갈등은 어디서나 존재한다. 그럼에도 한국은 꾸준하고 고집스럽게 문화유산 보호에 앞장서 왔다고 본다. 특히 춤 공연 등 무형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를 위해 국제사회와도 긴밀히 협력해온 점이 훌륭하다. 국제무대에서 좋은 사례로 언급될 만하다.”

―최근 한국에서는 천안함 사태로 안보 문제가 불거졌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문화와 예술을 누릴 정신적, 물질적 여유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나 역시 동유럽 출신으로 냉전을 겪었기 때문에 안보 문제를 일상에서 안고 살아야 하는 상황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다. 지난해 DMZ를 방문했을 때는 베를린 장벽이 연상되기도 했다. 유네스코는 이처럼 평화를 위협하는 문제들에 대해 더 많은 대화를 통해 상호 이해와 존중, 개방성을 증진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한국에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및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것 외에도 많은 후보 유산들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세계문화유산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인가.

“이론적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문화유산 수에 제한은 없다. 기준에 맞으면 등재되기 때문에 수도 늘어나고 있다. 다만 등재 기준이나 조건 등이 계속 바뀌며, 새로운 요소들도 계속 추가되고 있다. 자연 경관 자체를 유산으로 보는 개념은 최근에 나왔다. 이에 따라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의 비율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좋은 유산이 있더라도 등재 신청할 능력조차 없는 국가들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있다.”

―한 나라의 유산을 다른 나라가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의 경우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를 놓고 프랑스 정부와 계속 갈등을 빚어 왔다.

“그것은 서로의 입장이 걸린 상호분쟁(bilateral dispute)이다. 양측이 협상을 통해 풀어야 한다. 이런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각국의 유산 소유권 싸움에서부터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스페인과 라틴계 국가들의 유산 분쟁까지 역사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다. (한국과 프랑스처럼) 유사한 분쟁이 세계적으로 매우 많다.”

―유네스코는 위기에 놓인 세계유산(World Heritage in Danger) 리스트를 작성해 관리하고 있다. 귀한 유산들이 왜 위기를 맞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위기인지 설명해 달라.

“유네스코는 1972년 세계문화유산협약 체결 이후 리스트를 작성해 관리하고 있다. 문화유산을 가진 정부가 이를 보호하거나 유지할 능력이 없는 경우도 있고, 자연 재해로 유산이 파괴되는 경우도 있다. 유산의 가치나 보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도 한 가지 요인이다. 이런 문제는 특히 저개발국가나 개발도상국가에서 많이 발생한다.”

―전 세계적으로 각종 내전과 분쟁, 기아 같은 문제들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유산의 파괴도 심각해지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이런 폐해 앞에서 유네스코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는 문제다.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굴의 파괴는 인류 전체에 큰 손실이었다. 우리는 유산을 지키기 위한 펀드 등을 만들어 보존과 복구에 노력해 왔다. 바미안은 물론 다른 유산에 대한 연구 및 보호, 관리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이라크에서는 전쟁으로 파괴된 유산을 위한 위원회를 설치했다. 아프리카 우간다에서는 화재가 나서 귀중한 유산이 소실됐는데 지난해 현장을 방문해 보니 유네스코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우리가 기적을 만들어낼 수는 없지만 최선은 다하고 있다.”

―유산 파괴 사례가 꼭 후진국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지난해 독일의 ‘드레스덴 엘베 계곡’은 개발을 앞세워 유산의 가치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유네스코 사상 최초로 등재 유산 리스트에서 삭제되는 불명예를 안지 않았나.

“문제는 경제발전과 유산의 보존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점을 찾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아주 많은 경우 유산이 우리 성공의 희생양이 되곤 한다. 엘베 계곡의 사례는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지만 좋은 깨달음을 준 측면도 있다. 강에 대형 다리를 건설하는 문제를 놓고 개발 논리가 유산의 가치를 앞섰다. 이런 도전에 직면한 사례가 전 세계적으로 아주 많다. 전통과 현대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의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0월 유네스코의 첫 여성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 여성들이 문화 예술 분야에 강점을 갖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늦은 감이 있는데….

“다른 여러 국제기구에서도 상위 직책을 맡고 있는 지도자급 여성은 아직 소수에 그친다. 하지만 나의 경우 지난해 사무총장 선거 때 강력한 여성 후보들과 치열하게 경쟁했다. 4차 투표까지도 당선자가 나오지 않아 총 5차례 선거를 치러야 했다. 후보 5명 중 4명이 여성이었는데 나는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여성이어서 뽑혔다’는 말 대신 공정하게 선출됐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취임 이후에는 사무총장보 10명 중 5명을 여자로 선임했다. 이제 남녀 비율이 같다.”

―유네스코는 다루는 분야가 광범위해서 지나치게 분산돼 있다는 비판도 받는다. 지난해 10월 취임 이후 7개월간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무엇이었는지….

“기후변화에서부터 아프리카의 남녀평등 문제, 표현의 자유까지 유네스코가 다뤄야 할 일이 많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유네스코를 알리는 일에 가장 신경을 썼다.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그 가치와 역할이 소통되지 않으면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걸프 만 원유 유출 같은 사건에 대한 유네스코의 관심이 역할을 부각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마침 올해는 생물다양성의 해이기도 하다.

“매우 도움이 된다. 기후변화를 비롯한 환경 문제는 여러 가지가 복잡하게 얽힌 심층적 문제다. 유네스코는 특히 해양 분야에 관심을 갖고 환경 분야의 과학 전문성을 강화하는 데 노력해 왔다.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교육도 우리가 맡고 있는 주 업무다. 에너지 사용 등에서 기존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세계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때로 외로움을 느끼고, 길을 잃은 듯한 혼란스러움을 겪기도 한다. 이런 상태에서 문화와 유산은 자신감과 자아에 대한 확신, 평화를 줄 수 있다. 유산이 담고 있는 보편적 가치, 그리고 그것이 보여주는 역사는 공동체 사회에 자존감과 정체성, 자신감을 되찾아 줄 수 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유산은 중요하다. 많은 국가에서 유산은 주요한 수입원이자 경제성장의 바탕이 된다. 브라질만 해도 국내총생산(GDP)의 7% 이상이 문화에서 나온다. 신흥국에서 이 비중은 매우 높다. 유네스코는 이런 점을 더 널리 알리고 확산하고자 한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 보코바 사무총장은 누구?

불가리아 출생으로 불가리아 외교부 장관을 지냈고, 1996년 부통령 후보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프랑스와 모나코 주재 불가리아 대사 및 유네스코 상주대표부 대사 등을 지내며 30년 이상 국제관계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온 외교통이다. 비정부기구인 유럽정책포럼의 창립자이자 의장으로서 유럽의 통합 및 인권, 다양성, 문화 간 대화 같은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왔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메릴랜드대 행정대학원과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도 수학했다. 모국어인 불가리아어 외에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 등 4개국 언어에 능통하다. 지난해 유네스코 사무총장 선거에서 모두 5차례의 선거 끝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최초의 동유럽 출신이자 최초의 여성 사무총장이 됐다.

―1952년 불가리아 출생
―1976년 모스크바 국립대학원 국제관계학 석사
―1989년 미국 메릴랜드대 행정대학원 수료
―1990년 불가리아 사회당 당원
―1996∼97년 불가리아 외교장관
―1997년 유럽정책포럼 창립
―1999년 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수료
―2009년 10월∼현재 제10대 유네스코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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