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의 대화]최재천/'이름 있는 죽음들'

  • 입력 2003년 8월 6일 1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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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5일은 마릴린 먼로가 36세의 젊음을 안고 세상을 떠난 날이다. 이미 40여년 전의 일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최고의 섹스 심벌로 꼽고 있다. 영화 ‘7년 만의 외출’에서 지하철 통풍구로 빠져 나오는 바람에 치마가 펄럭이는 장면이나 케네디 대통령에게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던 그 질척질척한 목소리를 사람들은 지금도 기억한다.

케네디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나도 먼로와 나름대로 지울 수 없는 애증 관계를 갖고 있다. 중학교 시절 작문시간이었다. 영화평론가였던 선생님은 어느 날 감명 깊었던 영화 한 편과 좋아하는 남녀 배우 한 명씩을 생각해 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그때까지 극장에 가서 본 영화라곤 ‘연산군’과 그 속편 ‘폭군 연산’밖에 없었던 나는 그 둘 중 어느 영화가 더 훌륭한가를 고민해야 했다. 남자배우는 신영균이었고 여자배우는 누구였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질 않는다.

막상 수업시간이 되어 친구들이 차례로 좋아하는 영화와 배우들의 이름을 대기 시작하면서 내 계획은 중대 위기를 맞았다. 내 친구들은 한결같이 외국 영화와 배우들을 거명하고 있었다. 뭔가를 급히 생각해내야 했다. 등굣길 버스에서 내다본 극장 간판을 떠올렸다. 마침 ‘롱 쉽’인지 ‘빅 쉽’인지 하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음이 생각났고, 리처드 위드마크라는 주연배우도 떠올랐다. 그러나 여자배우가 문제였다. 하는 수 없어 짝꿍에게 도움을 청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영화 제목과 남자배우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고 난 다음 나는 친구가 쪽지에 적어준 이름을 읽었다. “마리…린…몬노요.” 순간 교실은 자지러졌고 선생님은 적던 걸 멈추시고 날 다시 한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영문을 알게 된 나는 그 벌거벗은 여인을 죽을 때까지 미워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나의 증오는 몇 년 후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TV에서 본 다음 사랑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 후부터 나는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가 누구냐는 질문에 거리낌 없이 “마릴린 먼로”라고 답한다.

얼마 전에는 먼로 못지않게 유명했던 캐서린 헵번이 사망했다. 그의 나이 96세였으니 그야말로 만수를 누린 셈이다. 연기력이야 어찌 됐건 나는 먼로가 훨씬 좋다. 젊은 헵번의 그 싱그러운 매력도 좋아하지만 말년의 쪼글쪼글한 모습이 자꾸 먼저 떠올라 내 가슴을 식힌다. 먼로는 그의 내리막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고 떠났다. 그래서 우린 그의 고운 모습만을 기억한다. 정상에 있을 때 떠나기란 본인에게는 어렵겠지만 뒤에 남는 이미지는 한층 더 강렬하다.

정몽헌 회장의 갑작스러운 죽음 역시 우리들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현대 가문을 생각할 때면 나는 종종 그리스 신화의 켄타우로스 종족을 떠올린다. 켄타우로스는 머리에서 허리까지는 사람이고, 그 밑은 말처럼 생긴 동물이었다. 켄타우로스는 인간의 일부가 말로 퇴화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말의 긍정적인 특성들이 조화를 이룬 신성한 동물이었다. 고 정주영 회장과 그 아들들에게는 인간의 지혜에 말의 강인함과 민첩함이 섞여 있어 보인다. 켄타우로스 가운데 가장 슬기로웠던 케이론은 죽은 후 여름 밤하늘의 궁수자리가 되었다. 오늘 밤 날이 맑으면 하늘을 우러러 은하수의 물굽이를 따라가련다. 정 회장도 부친을 따라 그곳에 올라가 있을 것만 같다.

누군가가 했던 말이다. “자살은 가장 잔인한 살인이다.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부친인 정주영 회장의 분위기를 가장 많이 닮은 듯한, 그래서 소탈하고 진솔해 보이던 그의 모습을 나는 참 좋아했다. 더 이상 추락하는 그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은 다행이지만, 그 옛날 먼로의 자살처럼 정 회장의 자살도 너무나 많은 의문과 아쉬움을 남긴다. 금강산 관광사업을 비롯해 그가 주도한 대북 경협사업에 할 일이 너무도 많이 남아 있다. 물론 부친의 숙원사업이기도 했지만 그가 혼신을 다했던 대북사업은 기업의 이윤보다는 오히려 민족의 염원에 더 가까워 보였다. 회개는 이제 우리 모두의 몫이다.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길 진심으로 바란다.

최재천 서울대 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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