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일과 꿈]심승현/나를 깨워준 '파페'에게

  • 입력 2003년 11월 5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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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니, 파페? 내가 처음 너를 그리던 시절. 낮에는 학생, 밤에는 애니메이션 회사에 다니며 나만의 표현방식을 찾아 고민하던 내게 네가 찾아왔지. 움직이는 그림에 대한 꿈을 좇아 주경야독의 고단한 삶을 기쁨으로 알던 내게 짙은 회의감이 몰려온 시기이기도 했어. 외주와 하청으로 점철된 국내 애니메이션계의 현실에 대한 좌절과 암담함.

그때 내가 사랑했던 그녀에게서 받았던 편지와 내가 써둔 글들을 다시 읽으며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는지를 깨달았어. 그런 이기적인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의 형태로 너를 연습장에 끼적이기 시작했지.

어릴 적부터 특별히 내놓고 얘기할 꿈을 지니지 못했던 나. 남들이 “나는 꼭 대통령이 될 테야”라든가 “저는 훌륭한 과학자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할 때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지. 그렇게 주눅 든 내가 가장 행복한 시간은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만화를 보는 때였어.

▼그거 아니? 스무살 포포와의 약속 ▼

내게 그림은 일종의 비밀과 같았단다. 그 숱한 미술시간에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나는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내 그림을 보여주기를 꺼렸지. 그저 아주 친한 친구에게만 그림을 그려 선물했으니까. 그래서 그 흔한 미술상 한번 받아보지 못한 내 재능은 정규 미술교육 한번 못 받고 시들어갔지.

미술과 전혀 상관없는 전공을 택해 대학에 진학했을 때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어. 그렇게 지독한 성장통을 앓던 스무 살에 그녀를 만났지. 군에 입대하기까지 딱 1년밖에 허용되지 않은 사랑, 그녀는 떠나갔지만 뮤즈는 내 곁에서 머물렀던 걸까.

제대와 함께 난 애니메이션 회사에 취직했지. 부족한 수면시간과 약간은 궁핍한 생활이 이어졌지만 마음껏 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는데….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일에 대한 열정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어. 그만큼 창작의 갈증이 점점 거세졌던 거야.

다시 종이와 연필로 돌아왔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그림 자체가 아니라 내 마음의 표현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그리고 오래된 편지들, 일기들 속에서 이기적이고 어리석었던 내 모습을 반성하는 그림부터 담담히 그려가기 시작했어. 우선 나의 분신으로 네가 태어났고 내게 뮤즈를 안겨주고 떠나간 그녀가 ‘뽀글머리’ 포포의 모델이 됐지.

파페, 그거 아니. 그렇게 태어난 ‘파페포포 메모리즈’에서 너는 때로는 어린이로, 소년으로, 청년으로 등장하지만 포포, 그녀만은 스무 살의 모습 그대로 등장한다는 것을. 포포, 너를 영원히 내 기억 속 스무 살로만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믿어줄 수 있겠니.

너희 둘이 세상에 나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너희들뿐 아니라 내게도 축복이었지. 그 덕분에 나는 전업작가가 돼 창작에 몰두할 수 있게 됐으니까. 하지만 너희들에게 쏟아지는 사랑이 커질수록 점점 초조해지는 것은 왜일까. 대중에 대한 질투심 같은 것은 아니란다. 그것은 최소한 너희 둘의 모습에만은 나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담겠다는 결심이 흔들릴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은 아닐까. 대중에 영합하지 않고 나 자신에게 충실한 작품을 그려가겠다는 그런 초심을 잃지 않도록 너희들이 같이 지켜줬으면 고맙겠구나.

▼‘진실한 모습’ 오래 지켜주길 바라 ▼

이제 나는 종이와 연필로 태어난 너희들을 다시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들여보내려 한단다. 너희들도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겠지만 그것이 내 꿈의 시작이었음을 잊지 말아주길 바란다. 그리고 우리 함께 그 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꿈을 나눠주자꾸나.

▼약력 ▼

△1971년생 △한경대 자원식물학과 졸업 △2002년 10월 자신(파페)과 여자친구(포포)를 모델로 한 만화 ‘파페포포 메모리즈’ 출간(한국출판인회의 선정 2003년 상반기 종합베스트셀러 11주 연속 1위) △2003년 10월 ‘파페포포 투게더’ 출간 △12월 ‘파페포포’ 시리즈 일본 대만 중국에서 번역출간 예정

심승현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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