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진덕규/지하철 우대권을 받고보니

  • 입력 2003년 10월 9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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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처음으로 지하철 우대권을 사용했다. 노인이기에 공짜로 지하철을 탄 것이다. 기분이 묘했다. 자꾸 뒤가 켕기고 누군가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함께 지하철을 탄 친구는 “무슨 죄 지었어! 몇 백억원을 삼키기라도 했나!”하면서 의기양양하게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했다. 그렇다. 몇 백억원은 고사하고 단돈 몇 십원도 먹은 적이 없다. 그러니 당당하게 지하철을 타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동행한 친구는 “우리는 비겁자라 민주화의 연금도 타지 못했고, 수당 받는 위원도 못 되었으니. 그래도 세금만은 꼬박꼬박 냈는데! 이 우대권 한 장이 산업화 세대의 위로금인 셈이지”라고 말했다. 그렇지, 세금은 부지런히 냈다. 재벌이 내는 액수에 비하면 세금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제때 납부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렇게 살아오면서 속상한 일이 어디 한둘이었나. 어떻게 해서 그들은 몇 백억원을 순식간에 삼킬 수 있었을까. 정치자금이며, 대북 비밀송금이며, 회수 불능의 공적자금 등 참 잘도 쓰는데, 그 돈도 알고 보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낸 세금이 아닌가. 정말 생각할수록 배가 아프다. 가슴도 답답하다. 이 나라에는 국회가 있고 감사원과 사직 당국이 있는데, 설마 그냥 넘어갈 리는 없을 테지. 그런 것 감시하라고 내 세금으로 고용한 사람들이 아닌가.

국회는 국왕이 부과하는 세금을 심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쯤은 중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우리나라 국회도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들었다. 예산안을 삭감해서 국민 부담을 줄이는 것, 그것 때문에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국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올해 정부 예산이 112조원이라고 신문이 보도했던 것 같다. 정말 어마어마한 돈이다. ‘일 잘하고 마음에 드는’ 정부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많은 예산도, 세금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세금을 낸 만큼 정부로부터 덕을 보고 있는가? 태풍이 와도 걱정 없을 정도로 예방이 철저하고, 홍수가 나도 둑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고, 교육체계가 잘 짜여 있어서 이민 갈 생각을 할 필요가 없고, 군에 입대한 젊은이들에게는 개인용 침대도 마련해 줄 수 있고, 부동산 투기도 사라지고, 직장 찾는 젊은이들이 쉽게 일자리를 얻는….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르다. 그렇게 믿고 싶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찜찜하다. 그건 그렇고, 국회는 지난해 예산심의 때 얼마나 제대로 깎았는가. 국회의원들이 자기 지역구에 더 많은 예산을 가져가기 위해 담합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남아 있다. 만일 그 돈이 자기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라도 그렇게 심의했을까.

결국 국회가 일을 똑바로 못해 나라가 이 모양인 것이다. 거대 야당이라면서, 심지어 ‘무당적(無黨籍) 대통령’의 기이한 정치 상황인데도 겨우 이런 정치를 엮고 있으니. 야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오르지 않는 것도 이해될 법하다. 철저하게 검토하고 세밀하게 따져서 정부의 불필요한 예산을 깎고 우리가 내는 세금을 줄여주는 국회라면 왜 지지하지 않겠는가.

당장 불요불급한 예산부터 찾아야 한다. 그 많은 정부 산하 위원회는 이제 그 위원회를 연구하는 위원회를 새로 만들어야 할 지경이다. ‘작은 정부’라는 말은 대선 때 구호로만 사용하는 말임을 알게 해 주는 것 같다. 정부 보조금을 지원받는 단체는 또 왜 그렇게 많은가. 그것에 드는 예산도 삭감해야 한다. 그래야 정부의 시녀 노릇을 한다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이 아닌가.

이번 국회에서 너무 철저하게 예산을 심의하면 요즘 내가 즐겨 사용하는 지하철 우대권도 사라질지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데! 이제 겨우 공짜 맛을 조금 알게 되었는데 말이다. 좋은 것은 그처럼 빨리 끝나는 것인가. 그 정도로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산업화 세대의 고생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니 지하철 우대권에 대한 기대는 접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역시 모든 것은 자기 이해부터 먼저 따지는 것인가. 이러니 국회의 예산심의도 결국 그렇고 그런 게 아닐까.

진덕규 객원논설위원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ips20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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