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 열린마음 열린세상]우리는 왜 토론에 서툰가

  • 입력 2003년 4월 2일 19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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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에 머리에 기름을 바른 적이 딱 두 번 있다. 한번은 장가가는 날이었고, 다음은 미국 병원에서 노사 협의 대표로 간 날이었다. 정장에 넥타이, 그날은 커피도 못 마시게 했다. 흥분하면 안 되니까. 일체의 감정은 집에 두고 냉철한 이성과 논리로 일관해야 한다. 목소리를 높이지 말라, 상대의 말을 가로막지 말라,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잘 들어라, 공감이 가는 부문엔 인정하라, 상대의 권위를 존중하라, 우리 주장에 무리가 있으면 솔직히 사과하라, 피해 의식을 버려라, 상대의 의견과 주장을 충분히 듣고 인정한 후 비로소 내 주장을 ‘조심스레’ 펴라. 100% 달성하겠다는 생각은 말라, 손해다 싶은 선에서 절충하라, 절충이 끝나기 전에 먼저 일어서지 말라.

대충 이런 게 선배로부터 받은 사전 교육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걸 회의에 참석한 모든 위원들이 철저히 지켜낸다는 게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우리 노사회의장은 분위기부터 공격적이다. 잠바 차림에 띠를 두르고 구호마저 결사 쟁취다. 거기에다 서로는 피해의식으로 잔뜩 성이 난 상태라 쉽게 감정이 격화된다. 노는 노대로 ‘우리는 혹사당한다’고 하고, 사는 ‘너희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고 한다. 이러니 그만 자존심 대결장이 되고 타협은 물 건너 간다. 억지, 오기가 발동하면 그만 흥분, 파업이다.

초조하게 지켜보는 온 국민을 실망시킨다. 대형 사업장일수록 실망은 더하다. 그 곳은 한국의 간판기업이요, 우리의 자랑, 우리의 자존심이 아니던가. 이건 그 사업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경직된 노사문화가 해외자본의 발길을 주춤거리게 한다. 게다가 국내기업마저 해외로 유출돼 산업 공동이 더 커지고 있다. 자라는 후대의 일자리가 걱정 안 될 수 없다. 끝내 그 사업장이 망하면 그 부담은 또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돌아온다.

우린 아직 토론에 미숙하다. 역사적으로 그렇게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을엔 위계질서에 따라 어른의 한 마디로 만장일치다. 그게 화합을 중시해 온 우리의 문화였다. 이런 풍토에서 민주주의와 함께 들어온 토론문화가 정착되기란 쉽지 않다.

가장 큰 장애물은 뭐니뭐니해도 감정적으로 되는 데 있다. 내 주장만 하고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삿대질, 우격다짐 등. 우리 국회는 그 전형이다. 토론을 통한 절충이 안 되면 다수결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리고 의결된 이상 싫어도 따라야 한다. 이게 잘 안 되는 게 우리 사회다.

고맙게도 노무현 대통령이 토론을 통한 의견 수렴을 하려 애쓰고 있다. 워낙 권위주의적 정치 행태에 염증을 느낀 국민에겐 신선한 충격이다. 그렇다면 이제 청와대 참모들이 유념해야 할 일이 있다. 우선 토론에는 ‘위원 1인 평등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참석하는 모든 사람은 지위 여하를 불문하고 똑같은 권리와 책임을 갖는다. 그러나 지난번 평검사와의 토론은 좌석배치에서부터 기본을 벗어났다. 뒷줄에 말없이 앉은 검사들. 다리 펼 테이블, 팔걸이도 없는 의자에 혼자 앉은 여성 장관, 이걸 생중계 하겠다는 발상, 끝난 후 누가 득을 봤느니 하는 자평까지 씁쓰레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토론이란 나와는 다른 의견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자리다. 한데도 우린 나와 의견이 다르면 마치 인간적 공격을 받는 것처럼 흥분한다. 배신감까지 든다.

물론 토론 외적인 문제로 시비를 걸거나 상대의 감정을 일부러 자극하는 건 비열한 짓이다. 제한된 시간에 자기 주장만 장황하게 펴는 건 폭력이다. 토론의 목적은 절충과 타협을 위해서다. 거기엔 완승도 완패도 없다. 때론 자기 주장을 철회하고 상대를 받아들임으로써 더 존경을 받는다. 그게 진정한 승자다. 어떤 경우에도 오직 나만이 옳다는 주장은 독선이다. 여기엔 어떤 신념이나 이념 종교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없다. 그걸 못해 우린 얼마나 많은 갈등과 마찰, 그리고 피까지 흘려야 했던가.

파병 문제로 온 나라가 토론장이다. 여기까진 좋다. 단,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협박이나 물리력 동원은 안 된다. 토론은 말로 하는 것이다. 다르다는 걸 존중하고 그러면서 전체적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모자이크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시형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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