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 열린마음 열린세상]"맏며느리는 인기가 없다"

  • 입력 2003년 3월 19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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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님이 혼자 점심을 들고 있다. 마침 들른 막내며느리가 깜짝 놀란다. “어머나, 어떻게 찬밥을? 형님은 어디 가셨나요?” 그리곤 밥을 짓느라 호들갑을 떤다. 시어머니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옷 가방을 챙겨 나온다. “어머님, 어딜 가시려고?” “그래, 더운 점심 해 주는 너희 집에 가서 살련다.” “네?”

요런 발칙한 것하곤! 그 어머님은 훌륭했다. 다시는 맏동서를 은근히 욕하거나 자기 앞에서 알랑거리지 못하게 단단히 가르친 것이다.

살림을 맡아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맏며느리는 인기가 없다. 잘 하면 당연하고, 못하면 구박이다. 따로 사는 동서들이야 잠시 들러 잘 해드릴 수도 있다. 형님 살림 잘못 산다고 입을 삐죽거리고 비판할 수도 있다.

▼정부도 ‘잘하면 당연 못하면 욕’▼

이게 주인과 손님의 차이다. 나라 살림을 꾸려가야 하는 정부 여당도 꼭 맏며느리 신세와 같다. 잘 해도 빛이 안 날뿐더러 그것도 모자란다고 야단이다.

야당이 인기가 있는 건 그래서다. 더구나 재야 세력은 스타다. 국민의 아픈 곳을 긁어주고 정부를 비판한다. 정의 평화 인도주의자요, 극단의 도덕론자다. 민주 자유 분배 민족 통일 반전 반미까지 그들의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다. 소외 계층을 옹호하고 상한 국민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준다. 듣기에 좋고 명분도 훌륭하다. 대안이야 없어도 된다. 그러다 때론 옥고를 치르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국민의 존경을 받고 인기는 올라간다.

국민의 절대적 인기를 업고 이윽고 선거에 압승한다. 정권을 쥐고 나면 그만 인기가 급락, 기대에 부풀었던 국민을 실망의 늪으로 몰아넣는다. 막상 살림을 맡고 보면 딴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도 이런 예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본인으로선 곤혹스럽기도 하겠지만, 이건 당연한 일이다. 비판으로 인기를 누렸던 손님 입장에서 이젠 매를 맞아야 하는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손뼉 치던 국민이 이젠 채찍을 들고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따가운 비판, 인기 하락, 그러나 이 정도는 참고 견뎌내야 한다. 일을 하는 당사자에겐 바람이 센 법이다. 주인이 된 이상 반짝 인기가 아니고 굳건한 신뢰를 얻어야 한다. 이게 올바른 주인의 자세다.

이걸 못 견뎌 주인으로서의 변신을 머뭇거리며 계속 재야 시절의 인기에 연연하다 보면 이번엔 나라 살림이 거덜난다. 남미의 교훈을 잊어선 안 된다.

한자리하더니 사람이 달라졌다고들 입방아를 찧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오히려 빨리 그렇게 되길 비는 게 나라의 먼 장래를 걱정하는 국민의 바람이다. 이제 당신은 이 집의 주인이다. 잠시 지나는 임시 정거장의 과객(過客)이 아니다. 전 인생을 걸어야 하는 종착역의 역장이 되어야 한다.

주인으로서의 자세를 채 가다듬기 전이어서 일까. 명분을 좇다 한미관계에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자칫 전쟁의 위험에 떨어야 했다. 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정권이 바뀔 적마다 들고 나오는 개혁의 깃발이다. 언제나 ‘용두무미(龍頭無尾)’로 그친 개혁 말이다. 이번 정권은 젊고 참신한 개혁적 인사들이 많이 참가하고 있어 ‘이번엔!’ 하는 국민의 기대가 어느 때보다 크다. 하지만 그만큼 국민의 불안도 크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지켜보기에도 아슬아슬하다. 막상 주역을 맡고 보면 뜻대로 잘 안 된다. 관중석에서 내려와 실전의 선수로 뛰어 보라. 그게 어디 뜻대로 되던가. 이걸 자각하는 것도 주역의 몫이다.

어설픈 개혁이 국민을 혼란과 곤경으로 몰아넣곤 했던 기억을 우린 잊지 않고 있다. 개혁적 인사와 유능한 인사는 다르다. 상수(常數)와 변수(變數)의 역학 관계도 면밀히 점검해야 한다. 파격, 개혁, 서열파괴 등이 새 정권의 화두다. 하지만 일단 상수를 튼튼히 한 기반 위에 변혁해야 한다는 것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을 터다.

▼인기만 좇다간 나라살림 거덜 ▼

개혁에는 언제나 저항세력이 있다. 이건 굳이 기득권자만은 아니다. 인간에겐 타성이 있어서 새로운 변화에 대해 의식, 무의식의 저항을 하기 때문이다. 인내심을 갖고 설득,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조직적 저항에 부닥쳐 개혁은 미완이나 혼란에 그칠 수도 있다.

단칼에 하려 들지 말고 점진적으로 해야 저항을 줄이고 혼란 없이 성공할 수 있다. 상식적인 이야기를 한 번 더 강조하는 뜻을 헤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건 ‘경제와 안보’다. 이건 국민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이것만은 새 정부가 확실히 챙겨야 한다. 명분에 밀려 실리를 놓쳐선 안 된다. 국민이 믿고, 안심하고 따를 수 있게 해야 한다. 주인은 인기보다 신뢰다.

이시형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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