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 열린마음 열린세상]“全州서 선비 한 번 돼보실래요?”

  • 입력 2003년 2월 5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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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9시, 기차에서 내려 곧장 그 유명한 콩나물국밥집에 갔다. 따끈한 농주 한 잔에 언 몸이 스르르 풀린다. 배고파도 참고 견디길 잘 했다. 정말 맛 좋다. 옛 맛 그대로다.

이튿날 새벽 전주포럼을 마치고 한옥마을 나들이. 경기전(慶基殿)엔 지금도 조선왕조의 얼이 퍼렇게 서려 있다. 제주도에서 온 선생님들과 함께 한옥마을 들머리, 전통문화센터를 찾았다. 연극기획을 전공한 분이 이곳 관장을 맡고 있다는 게 아주 신선했다. ‘전통’ 하면 어쩐지 진부하고 정적이어서 특히 젊은이들의 시선을 끌기가 쉽지 않다. 어설픈 한옥보다 건물부터 초현대식, 거기에다 동적인 기획과 프로그램, 절묘한 조화다. 마당놀이판에 앉으면 전주 3경이 둘러 있다. 상설극장엔 저녁 공연 준비에 벌써 무대가 바쁘다. 한벽루의 전주 정찬을 맛볼 순 없었지만 은은한 전통차 한 잔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큰 선비나 된 듯해서 기분이 좋다.

▼전통과 현대의 절묘한 조화▼

그리고 정말 놀랄 일은 바로 옆으로 흐르는 전주천에 쉬리가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악취로 썩어 가던 냇가, 지금도 시내를 관통하는 냇물이 이렇게 맑아질 수 있다니! 이건 시 당국의 의지만은 아닐 것이다. 시민 모두의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결코 될 일이 아니다. 전주의 맑은 선비정신이 부활하고 있는 감동적인 현장이다.

초롱등이 늘어선 옛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노라니 전통공예마을에서 발길이 멎는다. 난 여기서 오래 묵혀 왔던 아쉬움과 불만이 단번에 해소되는 듯했다. 사라져 버린 우리의 공예품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손재주나 솜씨만은 세계 제일이라는 한국민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반반한 기념품 하나 찾을 수 없다. 유적지나 절간 입구에 늘어선 그 많은 상점에서 마음에 드는 기념품 하나 고르기가 쉽지 않다. 외국인과 함께라면 더욱 난감하다. 최근에야 인사동을 비롯해 화랑에서 아담한 문화상품을 내놓고 있지만 이건 또 너무 비싸다. 조잡한 싸구려가 아니면 문화재급 작품이다. 이렇게 양극화되고 보니 대중화되기가 쉽지 않다. 사서 쓰는 사람이 없으니 더욱 비싸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젠 김치와 비빔밥까지 위협받고 있다. 문화는 그것을 향유할 안목과 여유가 있는 사람의 몫이란 게 실감난다. 유홍준 교수의 문화유적답사기가 우리 것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우리 안목을 높이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우린 아직 우리 것으로 체질화, 생활화하지 못하고 있다. 한복을 입으면 어색하듯이.

청와대 외빈 상에는 물론 명문가라면 품위를 생각해서라도 상차림에 나전칠기쯤 쓸 수 있는 안목이 있었으면 좋겠다. 사라져 가는 공예품의 명맥을 잇기 위해, 그리고 백성의 생활 품격을 한 차원 높이기 위해.

하긴 문화유산은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막강 서울의 재력으로도 북촌 한옥마을은 애물단지 같다. 전주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여기엔 현대와의 조화 속에 햇빛이 들고 있다. 한옥마을 주민에게 선비의 긍지를 심고 여기 사는 게 재산상이나 생활면에서도 득이 되게 할 것이라는, 시 당국의 합리적 기획이다. 이미 그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전통문화마당 근처에선 집값이 오르고 전주의 멋쟁이들이 이곳으로 이사올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면 전국에서 찾아 드는 과객(過客)들과의 하룻밤 멋진 친교에서 삶의 멋과 낭만, 즐거움이 넘쳐나리라.

전주는 도시이면서도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갖게 한다. 번잡한 도심의 소음, 환락의 분위기는 거의 없다. 우선 전주엔 사행성 오락이나 도박시설이 없다. 선비고을로서의 절조를 지켜야 한다는 시장의 의지 덕분이다. 살림을 맡아야 하는 지차체의 장으로선 이건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도박시설이 안겨 줄 손쉬운 세원(稅源)의 유혹을 물리친 시장의 의지가 존경스럽다.

▼‘돈벌이’ 포기한 市政에 박수▼

언제 전주를 가 보셨나요. 우린 지금 선비문화 기행을 기획하고 있다. 이름하여 ‘선비골 봄나들이’다. 전주엔 축제도 많다. 화려한 잔치도 좋지만 아무래도 선비의 담백한 정신을 음미하기엔 조금은 쌀쌀한 이른봄이 제격일 것 같다. 응달엔 잔설이, 양달엔 매화 방울이 맺힐 무렵이 좋을 것 같다. 한가로이 한나절을 어슬렁거리다 저녁엔 전통공연을 감상한다. 볼거리 먹을거리 놀거리 살거리가 푸짐하다. 전주비빔밥 한 그릇만으로도 나들이 노자가 아깝지 않을 것이다. 하룻밤 한옥의 과객이 되어 보는 것도 멋을 더해 줄 것이다. 전통공연이 끝나면 그곳 멋쟁이들과의 차 한 잔 뒤풀이에 벌써 가슴이 설렌다.

선비고을 전주의 전통과 정체성을 지켜내야 한다. 이곳만이라도 그래야 한다. 전통 한국의 자존심을 위해.

이시형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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