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성장과 균형, 두 토끼 잡기

  • 입력 2008년 9월 12일 21시 11분


한진중공업이 작년 12월 필리핀 수비크 만에 준공한 조선소는 231만 m²(약 70만 평)의 용지를 50년간 월 임대료 1000만 원에 사용한다(서울의 전망 좋은 대형 단독주택 중에도 이 정도 월세를 받는 곳이 있다). 법인세는 8년간 면제된다.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은 공사 기간 여러 차례 현장을 방문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수비크 조선소는 미국 해군이 1991년 떠난 뒤 쇠락해가던 이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올해 말 2단계 독이 완공되면 필리핀 근로자 2만 명이 이 조선소에서 일하고, 협력업체 직원과 지역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까지 치면 인구 10만 명 정도를 먹여 살린다.

한진중공업은 부산 영도 조선소에서 LNG선 같은 고기술 고부가가치선을 제작하고, 수비크 조선소에선 대형 컨테이너선 벌크선 탱커를 건조하는 국제분업 체계를 갖추었다. 한진중공업의 글로벌 경영에 박수를 보낼 일이지만, 필리핀으로 옮겨간 일자리를 생각하면 아쉬움도 크다.

무역 물동량이 늘면서 선박이 대형화하는 추세인데도 한진중공업은 영도 조선소 용지(8만 평)가 협소해 대형 선박 수주에 애를 먹었다. 100만 평 이상의 용지를 확보한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에 밀려 자칫 중소형 조선소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한진중공업은 부산 신항만 쪽에 바다를 매립하려고 해봤지만 정부는 시간만 끌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특혜를 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기업규제-억지 균형정책이 암초

정부가 그제 발표한 ‘5+2광역경제권 활성화 전략’에는 진해 통영 하동 남해 고흥 신안의 바다를 매립해 조선산업 용지를 공급하는 계획이 들어 있다. 이런 전략이 진즉에 나와 한진중공업이 조선 용지를 확보할 수 있었더라면 인구 감소와 공장 탈출로 활력을 잃어가는 부산 경제에 도움이 됐을 것이다.

STX조선도 이중삼중의 규제로 국내에서 조선소 용지 확보가 어렵게 되자 중국 다롄에 조선해양단지를 짓고 있다. 한쪽에서는 벌써 독을 파서 배를 건조하고 있다. 160만 평 규모의 다롄 단지가 완공되면 협력업체를 포함해 3만 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는 태안 무안 영암·해남 원주 충주 무주 등 6개 지역을 기업도시로 낙점했다. 기업도시 중간성과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대부분의 지역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 기업도시는 정부가 점찍어 줄 일이 아니라, 기업이 공장을 짓겠다고 움직일 때 소매를 걷어붙이고 도와주면 된다. 필리핀과 중국으로 나간 조선소만 붙잡았어도 기업도시 2개가 거뜬하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세계 최대의 조선업체 현대중공업은 주문이 밀려들어 울산조선소에 선박 블록을 놓을 땅이 없을 지경이 됐다. 그런데도 용지 확장이 어려워 군산에 조선소를 짓고 있다. 이 회사가 블록공장이나 조선소를 동남아로 옮기지 않은 것만도 신통하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2020년경 세계 선박 운송량이 지금의 세 배로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은 “요즘은 경박단소(輕薄短小)가 어렵고 중후장대(重厚長大)가 잘된다. 조선산업도 뒷다리만 안 잡으면 10∼20년은 먹고살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가 있는 울산 동구, 대우조선과 삼성중공업이 있는 거제, 포스코 제철소가 있는 광양시가 대표적인 기업도시다. 광양의 지역내총생산(GRDP)을 조사해 보면 1인당 소득 3만1000달러에 이른다.

김문수 경기지사와 비수도권 시도지사들 간에 공장총량제를 비롯한 수도권 규제 완화를 놓고 찬반 논란이 뜨겁다. 수심이 깊은 항만과 땅값이 싸고 광대한 용지를 필요로 하는 중후장대형 산업은 수도권으로 오라고 해도 올 수가 없다. 경제개발기에 낙후했던 서해안에 가보면 요즘 활기가 넘치는 도시가 많이 생겼다. 현대제철소가 들어서는 당진, 현대중공업 조선소와 새만금이 자리한 군산, 대불공단의 전봇대로 유명해진 목포 같은 도시들이다. 조선 철강 기계 정유 자동차 발전설비 같은 중후장대형 산업이 한반도의 해안을 따라 들어차면 자연스럽게 지역 균형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다.

長大型지방, 短小型수도권 유리

교육받은 인력이 풍부하고 각종 인프라가 잘 갖춰진 수도권에는 아무래도 경박단소형 첨단산업이 유리하다.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는 “중국의 충칭(重慶) 시는 면적이 8만2400km²로 남한 면적 약 10만 km²보다 조금 작다”며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존 퀴글리 도시계획학 교수는 한국을 하나의 도시 개념으로 개발하라고 권유한다”고 말했다. 국토가 좁고 인구밀도는 세계 3위인 나라에서 수도권 비수도권을 갈라놓고 다툴 처지가 아니다. 기업이 시장논리에 따라 가고 싶어 하는 곳에 공장을 세울 수 있도록 모두 나서 도와주면 경제성장과 균형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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