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정운찬의 선택

  • 입력 2007년 3월 9일 19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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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에 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정치를 한다 해도 기존 정당이나 정치세력에 업혀서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은 월요일 오후 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그렇게 잘라 말했다. 열린우리당이나 열린우리당에서 탈당한 통합신당모임 측이 ‘모셔 가는 그림’은 논외(論外)라는 것이다. 열린우리당도 함께할 의향이 있으면 들어오라는 것이지 당장 ‘모셔 가겠다’는 것은 아니다. 들어와서 판을 키워 국민의 주목을 끈 다음 경선을 통해 대선후보를 내놓자는 것이다. 이른바 ‘오픈 프라이머리(Open Primary)’다.

‘숨은 그림’은 毒이다

하지만 여권의 속내까지 여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정동영 김근태, 두 유력 주자의 여론 지지율을 합해 봐도 한 자릿수에서 맴도는 데다 나아질 기미조차 없으니 새 얼굴이 절실히 필요할 수밖에 없다. 여권의 한 인사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김근태 정동영으로는 안 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얘기 아닙니까. 이명박-박근혜 구도에 맞서려면 현재로서는 정운찬-한명숙 카드가 제격입니다. 우선 그림이 되니까요.”

여권이 원하는 ‘그림’으로서의 정운찬은 그의 말처럼 제격이다. 한국 최고 대학의 총장을 지낸 경제학자로서 개혁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데다 충청(충남 공주) 출신으로 ‘호-청(호남-충청) 연대’에 이점(利點)이 있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온 반면 현 정부와는 대학 자율권 등을 두고 마찰을 보인 점도 ‘탈(脫)노무현’에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노 정권에는 등을 돌렸지만 선뜻 한나라당 쪽으로 돌아서기를 망설이는 유권자층의 관심을 끌 수 있다.

그러나 여권이 원하는 ‘정치공학적 그림’은 역으로 정운찬에게 독(毒)이 될 수 있다. 실패한 정치세력이 책임은 회피한 채 화장(化粧)하고 포장을 바꿔 권력을 이어 가려는 데 기여한다는 비판은 그의 본의(本意)야 어떠하든 일정한 공감(共感)을 얻고 있다.

열린우리당 장영달 원내대표는 최근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남북) 전쟁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개인 소신이라고는 하지만 집권세력 전체에 대한 절망만 깊게 하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평화세력 대(對) 전쟁세력’이란 적대적 이분법의 낡은 사고(思考)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세력에서 무슨 미래의 희망을 찾겠는가.

정 전 총장은 “우리에게 미국처럼 튼튼한 양당구조가 정착되어 있고, 한나라당의 수권(受權) 자세를 신뢰할 수 있다면 (진보정당 실패에 따른) 보수정당의 집권은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의 한나라당에 나라의 미래를 맡길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정치에 뛰어들고 대선에 나설지 고민하고 있는 근본 이유라는 것이다.

그는 서울대 총장(2002년 7월∼2006년 7월)을 그만두기 얼마 전부터 ‘나라의 미래 그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고 자신의 역할, 즉 대통령감이 되는지, 선거에 나선다면 이길 수 있을지, 안 되더라도 의미 있는 메시지는 전달할 수 있을지, 대통령이 된다면 잘할 수 있을지 등을 고민해 왔다고 한다.

그는 아직은 결정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이미 ‘정운찬의 정치 진출’을 120% 확신하는 분위기다. 당사자도 그걸 부인하지 않는다면 시간을 끌고 재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옳지 않다. 결정하기 전에는 정치적 몸짓이나 발언을 삼가야 한다.

‘나라의 미래 모습’ 제시해야

결정하면 ‘정운찬이 그리는 나라의 미래 모습’을 국민에게 제시해야 한다. 어떻게 나라를 고쳐 나갈 것인지, 경제와 남북문제, 교육 등 국가 현안(懸案)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代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가마도 타지 않고, 들러붙지도 않겠다면’ 누구와 어떻게 힘을 모아 자립(自立)할 것인지도 분명히 해야 한다. 한국 정치에서 제3세력화는 고건 전 총리의 실패에서 보듯 쉽지 않다. 실체가 없는 세력은 신기루일 뿐이다.

선택은 그의 몫이지만 무거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인물이 정치판의 ‘흥행 배우’로 비치는 건 모두에게 좋지 않다. 그 역시 ‘그림’이 되길 원하는 것은 아니잖은가.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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