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이성형/제3세계 전문가 키울때다

  • 입력 2004년 6월 29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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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제3세계 외교 수준이 만천하에 그대로 드러났다. 이라크 대규모 파병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현지에 제대로 된 정보 시스템 하나 꾸리지도 못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비단 외교통상부와 국가정보원만의 잘못이겠는가. 이라크를 잘 아는 전문가가 거의 없다시피 한 마당에 주먹구구로 하지 않을 방도가 있었겠는가. 안타깝지만 우리 사회 전체의 실력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현지 사정에 밝은 우리 전문가가 없다면 외국의 전문가를 몇 명 고용해서라도 접근하는 것이 차선책이 아니었을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심정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현실을 반성해야 한다. 더불어 해외지역 전문가의 양성이 얼마나 시급한 과제인지 새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현지실정 어두워 거듭 시행착오▼

지난 10여년간 우리는 ‘국제화’와 ‘세계화’ 슬로건의 범람 속에서 허덕였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1000억원의 재원을 동원해 통상 및 지역 전문가 양성에 힘썼다. 하지만 각 대학교에 사이좋게 나눠준 돈은 국제대학원의 통상 프로그램에 중복 투자됐고, 결국 우리에게 요긴한 지역전문가 양성 문제는 용두사미로 끝났다. 국제대학원 어디에도 중동, 동남아, 중남미를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곳이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고, 우리는 이렇게 또 수난을 겪고 있다.

얼마 전에 곤욕을 치렀던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의 경우도 우리의 국제화 수준을 보여주긴 마찬가지였다. 5억달러 수출에 7억∼8억달러 수입(이 중 구리 수입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이니 충격도 크지 않을 터이고, 연습게임의 스파링 파트너로 적합할 것이라는 지극히 경제학적인 사고가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급기야 분노한 농민이 의사당에 진입을 시도하는 등 여러 차례 진통을 겪은 뒤 협정은 발효되었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숫자의 이면을 읽어내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당한 일이었다. 중남미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했을 터인데, 이는 생략되었을 것이다. 중남미 전문가라면 칠레보다는 멕시코와의 자유무역협정이 실익도 많고 구조조정의 부담도 적다는 것을 안다. 실제 멕시코 정부는 이 시점에 우리와 협정을 맺을 의도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기회를 놓쳤고, 멕시코는 현재 일본과 협상을 하고 있다.

해외 지역연구의 수준이야말로 우리의 외교와 통상 수준을 결정한다. 무역대국이지만 바깥 세계에 관한 지역전문가 수는 터무니없이 적고 그 수준도 높지 않다. 대학교도 연구기관도 이런 분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주어진 기회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외교는 항상 사후약방문식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도 중동, 인도네시아, 멕시코와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깊이 있게 연구할 시점이 되지 않았는가.

지역전문가를 키우기란 쉽지 않다. 일단 우수한 인력이 이 분야에 투입되어야 하고, 장기간 언어와 현지 훈련을 시켜야 한다. 기초역량을 갖춘 다음에도 그 역량을 숙성시킬 연구 기간이 요구된다.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기질도 조금은 있어야 한다. 문제는 그것이 분과학문 전통이 강한 우리 학계 풍토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라크와 칠레로 홍역을 치르면서 이제는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은 생긴 것 같다.

▼우수인력 장기간 적응훈련 필요▼

정부는 이번 사태로 땜질 처방을 넘어서 진정 문제의 진원이 어디인지 심각하게 숙고해야 할 것이다. 지역전문가의 대대적인 훈련과 수혈이 없이는 우리의 외교나 통상의 수준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충격에 대응만 할 뿐이다. 우리는 대북 문제로 인해 4강 외교에 발목이 잡혀 있다. 하지만 자원과 무역의 돌파구는 제3세계에 있다. 이제 시선을 4강 외교를 넘어 글로벌 외교에 두어야 한다. 아울러 국민 각자도 우리가 통상국가란 점을 명심하고, 한 국가를 평생 공부하는 기풍을 가지면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식견도 훨씬 풍부해질 것이다.

이성형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원·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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