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송호근/우파들의 ´保-革투쟁´

  • 입력 2002년 4월 9일 18시 17분


좌우파 색깔논쟁이 치열하다. 그런데 한국정치에 좌파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좌파는 없다. 아니, 정치문화 자체가 좌파를 허용하지 않으며, 좌파이념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고 있는 정치인은 아무도 없다.

김대중 정권도 사회정책에서 약간 진보적 성향을 드러냈을 뿐 경제정책은 우파 이상이다. ‘중도 우파’라고 규정했던 초기의 위치 설정은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로 인해 애초부터 우향우로 급전했다. 다른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오리지널 좌파´는 없다▼

좌파의 본산인 유럽에도 ‘오리지널 좌파’는 사라졌다. 급진 중도를 표방한 영국의 블레어, 신중도(Neue Mitte)를 내세운 독일의 슈뢰더, 쇄신 좌파를 지향하는 프랑스의 집권사회당 등은 모두 좌파 국정철학이었던 케인스주의를 이미 버리고 통화주의라는 ‘천박한 우파 정책’으로 선회했다. 세 정권 모두 보수당 업적으로 일컬어지는 노조 묶어두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규제완화와 복지축소 정책으로 시장의 공세에 답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독일 좌파 정치의 수장 격인 라퐁텐이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고 일갈했겠는가.

21세기 유럽의 좌파는 우파적 경로를 채택했다. 세계화의 물결이 공평하게 작용한다면 한국도 동일한 압력 속에 놓여 있다. 여기에, 유럽에는 없는 ‘미국의 강한 입김’을 고려하면 한국정치나 정치인이 좌파성향을 갖출 여지는 아예 없어진다. 사정이 이럴진대, 싸잡아서 좌파 정권 혹은 좌파 정치인으로 몰아세우는 행위는 좌익 공포를 환기시켜 반사이익을 챙기려는 불순한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공격수나 수비수나 모두 우파 이념에 투철한 정치인들인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최근의 공방전은 좌파와 우파의 충돌이 아니고, 우파의 스펙트럼 내에서 보수와 진보가 자리다툼하는 꼴이다.

한국정치가 삼류 딱지를 떼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도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첫째, 정치인들 스스로 미진하나마 지난 10년 동안 어렵게 쌓아놓은 성과들을 부정하고 무너뜨리는 나쁜 관행을 거리낌없이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 체제의 전면 부정을 통해 자신을 정당화해온 한국정치의 고질적 병폐는 세 번째의 민주정권을 창출할 시점인 지금에도 여전히 유용한 무기로 쓰인다. 인정(認定)은 찬양으로, 찬양은 모종의 음모로 읽히기 때문이다.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DJ정권은 적어도 정책노선의 공간을 넓혀 보수파의 세계가 유일한 것은 아님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공적이 인정된다. 둘째, 1987년 민주화가 시작된 이래 보수파들은 미래 비전을 내놓는 데에 실패했다. 미래 비전은커녕 개혁파들이 역량 부족으로 휘청거리고 있을 때에 그것을 보완할 대안을 만들지도 못했으며, 실망과 좌절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지도 못했다. 일자리 없는 청년들에게 보수파는 무엇을 내놓았으며, 해고당한 중년세대, 무너진 가정, 위태로운 비정규직, 거리에 나선 노동자, 치솟는 집값으로 허탈해진 중산층, 실의에 빠진 교사, 분노한 의사들에게 어떤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했는가. 보수세력은 그 동안 어디에 있었는가. 민주주의를 향한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개혁파의 구상이었다. 비록 개혁세력의 잘못된 판단과 서툰 솜씨 때문에 자주 화를 자초했지만, 돌이켜보면 느릿느릿한 발전의 궤적은 분간해낼 수 있다.

아직 형체는 분명치 않지만 이번 대선에 임하는 국민정서의 중심부에는 ‘3김 시대의 종말’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것은 3김과는 유별나게 다른 어떤 특성에 무작정 환호하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 흥미롭다. 독선, 경륜, 카리스마, 지역주의가 3김의 레이블이었다면 이것들과는 가능하면 거리가 먼 지점으로 눈을 돌리고자 하는 것이 유권자들의 막연한 저항심리다. 지역을 아우르고, 카리스마도 없으며, 준비되지 않았기에 무작정 좋아지는 후보가 뜨는 이유는 이렇게 비교적 단순하다. 이런 심리는 유권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젊은 세대일수록 강한데, 여기에 색깔 논쟁이 먹힐 리 없다.

▼국민경선제 세대戰 양상▼

국민경선제가 세대전 양상으로 치닫는 배경에서 분명하지 않고 몸소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기득권을 독차지해온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층의 반란심리가 발견된다. 본선이 개막되면 판도는 사뭇 달라질 것이지만, 대권을 꿈꾸는 사람들은 두 가지 점만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정치에는 우파 내부에서 보혁 투쟁이 있을 뿐이며, 그것도 3김 이미지와의 결별투쟁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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