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김미현/남과 여의 '윈윈게임'

주름살, 자동차, 연민…. 점점 늘어가는 것들이다. 머리카락, 나무, 호기심…. 차차 줄어드는 것들이다. 허리둘레, 소득 신고액, 사랑…. 의지에 따라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늘이거나 줄일 수 없다. 그런데도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도둑은 그 일을 했다. 그는 나그네를 유인해 자신의 침대보다 길면 잘라서, 짧으면 늘여서 죽였다. 그 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말은 폭력적인 규준을 의미하게 된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혀진 나그네들이 많다. 인륜 아닌 이념에 의해 만남과 헤어짐을 겪어야 하는 이산가족들, 의사와 약사 사이에서 골병드는 환자들, 떠날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는 조기 유학생들. 그들은 자신의 몸이 차라리 고무줄처럼 늘거나 줄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물론 그들도 딱하지만 그들보다 먼저, 그리고 오랫동안 그런 고통을 당한 나그네들이 있다. 바로 여성들이다. 모난 여성은 정 맞고 못난 여성은 왕따 당하니까. 똑똑한 여성은 피곤해서 싫고, 얌전한 여성은 답답해서 싫단다. 그러니 여성의 몸은 남성 중심적 잣대가 요구하는 신축성을 가져야 한다.

게일 에반스의 ‘남자처럼 일하고 여자처럼 승리하라’와 김진애의 ‘여자 우리는 쿨하다’와 같은 책에 눈이 가는 것도 이런 딜레마 때문이다. CNN의 부사장인 게일 에반스와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1세기 차세대 지도자에 뽑힌 건축가 김진애. 그들의 이력과 능력이 그들의 몸 길이에 관심을 갖게 한다. 두 여성 모두 여성 승진의 최 상한선이라는 ‘유리 천장’을 거부한다. 더불어 남성에 비해 부족한 여성의 자질도 까발린다. 여성 스스로가 피해의식과 보상심리로부터 벗어나라는 주문이다. 그래야 단선적인 남녀 대립이나 구호성의 페미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이상’이 아닌 ‘현실적인 이상’을 그리기 때문인지 ‘남성처럼 일하는’ 모습에 비해 ‘여성처럼 승리하는’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여자로서 여자를 넘어서는 여자’보다는 ‘명예 남성’이 더 ‘쿨’해 보이는 것 같다. 평범한 여성 독자들에게는 말이다. 남성에 가까운 여성이어야 승리한다는 ‘현실적인 현실’을 다루기 때문일 것이다.

신기한 것은 본격화된 미국 대선에서 퍼스트레이디 후보들이 보여주는 차이점이다. ‘제2의 힐러리 클린턴이냐 제2의 바버라 부시냐’라고 묻는다니까. 민주당 후보인 앨 고어의 부인 티퍼는 ‘치어리더 티퍼’라는 별명처럼 적극적으로 남편을 돕는다. 반면에 공화당 후보 부시의 부인 로라는 시어머니처럼 조용한 내조를 한다. 대의원의 50%가 여성인 민주당과 그 90%가 보수적 백인인 공화당의 성격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이런 이분법은 이제 진부하다. 여성을 여성의 적으로 만들려는 음모도 느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민주당의 최고위원 경선이 한창이다. 15명의 후보 중에는 2명의 여성 후보가 있다. 단일 여성 후보임을 내세우는 김희선의원과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는 추미애의원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추의원의 출사표이다. 자신은 여성이 아닌 소장파 후보이며, 여성 후보가 둘이면 표가 나눠질 것이라는 패배주의적 발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 후보 단일화에 대한 논란이 없는 가운데 이뤄졌다면 더 당당하게 들렸을 초성적(超性的)발언이다.

여성은 그냥 여성일 뿐이다. 성씨보다 다양한 것이 여성들의 모습이니까. 그래서 여성들의 마음 속에는 티퍼도 있고, 로라도 산다. 성공한 여성만이 아니라 평범한 여성도 떳떳할 수 있는 것이 진짜 여성해방이다. 여성의 평등은 침대에 맞춰 잘리거나 늘여지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여성의 몸에 맞춰 침대를 고를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이 프로크루스테스가 되자는 것도 아니다. 남녀가 이기거나 지는 ‘파워 게임’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이기는 ‘윈윈 게임’을 하자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본격 게임은 시작되지 않은 채 지지부진한 오픈 게임만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여성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21세기의 벽두에도 한국의 여권은 세계 63위라니까. 남성은 여성스러울 때만 욕먹지만 여성은 남성 같아도 욕먹으니까. 그래서 없어야 정상인 여성부가 필요한 상황이니까.

김미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