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아버지의 이름으로

  • 입력 2000년 7월 13일 15시 54분


아버지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the Father (1993)

감독: Jim Sheridan

출연: Daniel Day-Lewis(Gerry Conlon) / Emma Thompson (변호사)/Pete Postlethwaite( Giuseppe Conlon)

나라마다 인접국에 대해 역사가 저지른 잔혹함의 부채를 지고 산다. 잉글랜드가 아일랜드에 진 부채는 무겁다. 그 부채는 어쩌면 한 때 정복자가 되었던 나라에 공통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부채의 중요한 부분은 오만과 편견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일랜드인의 범죄를 수사하는 영국경찰의 태도에는 악의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미필적 고의’가 내포되어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안보와 치안이라는 중요한 국사는 속성적으로 잔혹한 인권유린의 위험을 동반한다. 인위적인 여론의 조작을 위해 필요한 시점에 터졌던 준비된 ‘간첩단 사건’처럼 국가안보와 치안 사이에 절대적인 함수를 담아온 나라에서는 더욱더 그 위험이 높다. ‘인권지표’라는 국제적 기준도 특정 국가에 특유한 안보와 치안의 사정을 감안한다.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Father)는 역사의 짐과 권력의 잔혹함을 함께 일깨워주는 좋은 소재가 된다. 영화가 주는 감동은 어느 나라에서나 가능한 이야기,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공감에서 나온다.

흔히 영국에서 “길포드 4인방 사건” (Guilford Four)으로 불리는 실제사건을 재구성한 이 작품의 제목은 4인 방의 주범 격인 제리 콘론(Gerald Conlon)의 자전적 저술, “밝혀진 무죄”((Proved Innocent, 1993)를 개명한 것이다. 오명을 진 채 죽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진실을 밝혀내는 사부곡(思父曲)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제리의 회고로 사건이 전말이 보고된다. 중간중간 자동차를 모는 여인의 초조한 모습이 무언가를 암시한다. 그 암시는 영화의 후반에 그녀가 진실을 밝혀내는 변호사임이 밝혀지면서 실마리가 풀린다.

1974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는 폭약업자와 건달패에게 특히나 바쁜 한 해였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선언한 아일랜드공화군(IRA)은 영국전역에 걸쳐 폭탄테러를 벌인다. 거리에서 데모가 벌어지면 막연히 세상에 대한 불만을 품은 건달들이 덩달아 춤춘다. 벨파스트의 청년 제리는 일정한 직업 없이 좀도둑질과 마약으로 청춘을 죽이는 건달이다. 반정부 단체 요원들과 교분은 있지만 이념성은 전혀 없다. 한 번 격렬한 시위에서 설친 일 때문에 정부군과 공화군 쌍방으로부터 기피당하는 인물이 되자 순박한 아버지 쥬세페는 화근을 피하기 위해 아들을 런던의 친척집으로 보낸다. 런던에 도착한 제리와 친구 폴은 아버지의 말대로 친척집에 기거하는 대신 자유연애와 마약을 표방하는 반항아 ("flower children") 집단에 가입하여 어울리나 이내 쫓겨난다. 제리가 일으킨 여자문제 때문이다. 빈털터리로 공원의 노숙자 신세가 된 둘은 벤치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고 기득권을 주장하는 찰리 버크라는 부랑자노인을 상대로 실랑이를 벌인다. 공원에서 쫓겨난 둘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주운 열쇠로 매춘부의 아파트에 침입하여 돈을 훔쳐 유흥비로 탕진한다. 바로 이날 길포드시의 대중 펍에서 폭탄이 터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IRA의 소행이다. 제리일행을 쫓아낸 “자유연애당원”이 경찰에게 두 사람을 혐의자로 제보한다. 범인의 체포에 혈안이 된 경찰로서는 더 이상의 호재가 없다. 신빙성이 취약한 증거를 근거로 제리 일당을 체포한다. 이어서 체포된 아들의 변호사를 구하러 런던에 온 아버지 쥬세페도 체포된다. 불과 며칠 전에 제정된 특별법은 폭탄테러의 혐의자를 영장 없이 7일간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경찰에 부여했다. IRA가 폭탄을 제조하듯이 경찰은 증거를 제조해낸다. 노골적인 고문과 협박, 유도, 기망, 회유, 각종 수법을 동원하여 자백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아버지를 권총으로 쏘아 죽이겠다는 협박에 굴복한 제리와 기망당한 폴에 이어 추가로 구속된 캐럴과 패디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통해 자백했다. 이것이 역사의 인물이 된 "길포드 4인방“의 탄생과정이다. 네 사람 모두 살인죄로 기소된다. 제리의 아버지와 애니 숙모, 그리고 14살 짜리 소년 패트릭을 포함한 이른바 ”맥과이어어 7인방“(Maguire Seven)이 추가로 기소된다. 폭발물 제조와 범인은닉처를 제공한 혐의다. 애니 아주머니의 집을 수색한 경찰이 폭탄의 원료로 널리 사용되는 니트로글리세린의 흔적을 확인한 것이다. 니트로 글리세린은 가정용 세제로도 통용되고 있는 화학물질이다. 경찰의 공식 보고서는 폭탄용으로 사용된 가능성에 대해서는 몹시 회의적이었으나 딕슨경위는 창의적인 위증을 통해 이를 유죄의 증거로 제시한다.

11명의 피고 전원에 대해 유죄평결이 내려졌다. 길포드4인방에 대한 증거는 보강증거가 전혀 없는 자백뿐이었다. 증언대에 선 경찰은 고문한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했고 제리와 폴이 알리바이로 주장하는 공원의 주정꾼, 찰리는 찾을 수가 없는 허무인이며 매춘부집 절도사건은 보고된 기록이 없다고 증언한다. 제리와 폴은 자신들의 결백함과 강요된 자백을 하게된 경위를 상세하게 진술했지만 상습적인 도둑질과 마약복용의 사실이 알려진 이들의 증언의 무게는 지극히 낮았고 건달보다 경찰에 더욱 신뢰를 보내는 배심은 쉽게 유죄평결을 내린다. 이어 반역죄(treason)로 기소되지 않은 것이 유감이라면서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낸 판사는 제리에게 무기징역에 최소 30년의 중형을 선고한다. 맥과이어 7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중형이 선고된다. 14살 소년 패트릭에게도 13년 징역이 선고된 것이다.

콘론부자는 황색 견장을 달고 감옥에 함께 수용된다. 마치 우리 나라의 국가보안법 위반자에게 빨간딱지를 붙이듯이 영국 교도소에서 황색 견장은 가장 무거운 반사회적 낙인의 표지인 것이다. 한방에 수감된 부자간의 긴장과 대립은 인간 제리의 개안의 과정을 부각시킨 점에서 ‘성장소설’의 전형적인 요소를 갖춘다. 이 과정을 통해 비로소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라는 제목이 빛을 발한다.

아버지의 이름 “쥬세페” (Giuseppe)는 할머니가 막연하게 호감을 가졌던 이태리 아이스크림집 주인 아저씨 이름을 딴 것이다. 오로지 정직하고 바르게 살 것을 훈계하는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는 엄청난 벽이다. 평생 단 한번 상을 탄 축구시합이 끝나고 나서도 파울볼을 찬 것을 질책하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땅바닥에 아버지의 이름을 써놓고 오줌을 쌌던 일곱 살 때부터 아들은 반항했다. 잡역부로 세상에 번 듯이 내세울 것이 없는 초라한 아버지는 아들의 눈에는 기껏해야 엄한 위선자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아버지는 부끄러운 존재였을 뿐이다. 신앙이 없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무력한 가톨릭 신앙은 냉소의 대상일 뿐이다. 결코 저지르지 않은 죄로 수형생활을 하는 부자의 상반된 태도는 신앙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에서 유래할 지도 모른다.

진실이 밝혀질 기회가 있었으나 경찰이 은폐한다. IRA의 핵심 테러리스트 조가 체포되면서 자신의 길포드사건의 주범임을 자백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석방할 것을 주장했으나 경찰에게 더없이 당혹스러운 이 사실은 덮여진 채로 버려진다. 최후의 순간까지 아들을 사람으로 만들 것을 포기하지 않는 아버지는 조의 패거리와 놀고 마약에 손대는 아들에게 실망을 금치 못한다.

우연히 감옥을 시찰 나온 민권 변호사(Gareth Peirce, 엠마 톰슨扮)의 등장과 더불어 국면이 전환된다. 그녀의 노력으로 위증, 허위의 증거, 감추어진 증언, 강요된 자백, 진범이 밝혀진 이후에도 계속된 사실 은폐 등 경찰의 온갖 비리가 한층 씩 벗겨진다. 그녀는 찰리 버크를 찾아 런던의 모든 공원을 샅샅이 탐색하고 경찰문서보관소에 보관된 콘론 부자의 서류를 열람할 것을 허가 받는다.

진폐증의 악화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격려하는 변호사에게 “아버지에게 헛된 꿈을 주지 말라”라며 냉소하는 아들, 경찰은 가석방에 동의하나 아버지는 무죄를 주장하면서 죽어간다. “엄마를 남기고 이방인 틈에 죽는 것이 유감”이라며 아버지는 눈을 감는다. 아버지의 죽음에 임박해서야 비로소 아들은 아버지의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 초라하고 비겁한 사내로 경멸했던 아버지야말로 가장 강한 내면을 가진 위대한 인간임을 아들을 깨달은 것이다. “쥬세페가 죽었다” 한밤을 가르는 슬픈 소식에 모든 감방의 환기구로부터 내던져진 소지(燒紙) 조각이 최명희의 『혼불』의 꺼멍굴 사람들의 서러운 혼백처럼 편편히 나른다.

아버지가 죽음은 아들의 새로운 탄생이다. 생명의 바통 텃치가 이루어 진 것이다. 새 사람으로 거듭난 제리의 투쟁의식과 민권변호사가 주도한 시민운동이 진실을 밝히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계기는 실로 우연히 찾아든다. 휴일 대체근무을 하던 경찰이 이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경찰이 실수로 “대외비” 문서를 변호사에게 건네준 것이다. “ 피고인측에 보이지 말 것”이라고 적힌 서류철 속에는 놀랍게도 이들이 체포된 직후에 찰리 버크를 심문한 경찰기록이 담겨 있었다. 경찰은 이들의 알리바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폭탄이 터진 후, 15년만에 고등법원에서 재심이 열린다. 네 사람 모두에게 공소기각이 선언된다. 재심이 열리고 무죄가 확인된다. 법원정문을 통해 당당하게 대로에 나서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결백함을 밝히겠다”는 제리의 모습을 뒤로하고 자막이 비친다. “길포드사건으로 인해 IRA단원 누구도 기소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수사에 관여했던 형사들은 면책되었고 경관들에 대한 기소는 없었다.” 영화가 끝나도 쉽게 자리를 뜨기 힘든 것은 이 메시지가 주는 아픔과 무거움 때문이다. 무고한 사람을 절망과 죽음으로 내 몰았던 그 폭력의 망령이 아직도 우리들 속에 살아 있다. 검사 출신 대법관 후보의 인사 청문회는 끝이 났다. 약간의 논란이 있었지만 무난하게 인준되었다. 유서대필사건과 국과수의 필적감정은 관련된 공무원이 뇌물수수에 연루된 것이 밝혀지면서 국가기관의 공신력과 도덕성에 대한 중대한 타격이 되었지만 우리의 법원도 의회도 문제삼지 않았다. 재판도 역사도 기록일 뿐 진실이 아니기 때문일까? 문제는 보복이 아니라 진실이다. 용서는 하되 결코 잊지는 말자. 진실은 여전히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지 않은가?

안경환(서울대 법대교수) 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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