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박효신]만지지 마시오!

  • 입력 2008년 9월 27일 03시 00분


중고교 시절, 가을 국화 향기 속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가 열렸다. 동양화와 서양화가 걸린 전시장을 지나면 단체관람의 긴 동선은 조각 작품을 전시한 큰 방으로 이어진다. 그곳에 가면 늘 ‘나부(裸婦)’라는 제목이 붙은 조각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작품은 항상 ‘만지지 마시오!’라는 큼직한 경고문을 달고 있었다. 검은 교복을 수도사의 유니폼인 양 입었던 남자 중고교생에게 미술 전람회장은 여인의 나상을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엄중한 경고문도 사춘기 남학생의 원초적 호기심을 구속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전라의 작품을 이리저리 살펴보노라면 특정 부위에 묻은 남학생들의 손때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수줍은 표정으로 친구들과 킥킥대며 웃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개구쟁이 학생들이야말로 ‘진정한 미술작품의 감상자’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조소와 같은 입체작품은 대부분 야외의 반영구적 전시를 목적으로 만들고, 또 작가가 손으로 재료를 만지고 다듬고 두드려서 빚어낸 것이다. 감상하는 사람은 작품을 자유롭게 만져봐야 조형성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작가가 선택한 재료인 흙, 돌, 철, 동(銅) 그리고 나무의 질감을 만져보지 않고 어찌 제대로 느낄 수 있겠는가? 나상을 만든 예술가가 숨겨진 여체의 성감(性感)을 어필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니 감상의 늪에 빠진 관람객이 작품을 만져보고 싶은 것은 어찌 보면 예술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미술작품에 대한 수동적 감상법은 미술의 태생적 귀족성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술은 권력자의 소유였고 그들만의 문화였다. 대중은 미술작품 앞에 서면 왠지 움츠러든다. 산업화와 함께 귀족적인 미술의 모체에서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온 실용적인 미술이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대중의 삶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미술을 대신해서 평범한 사람의 일상에 실용성과 조형성을 심어주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상에 평등사상이 번지자 미술도 도도함을 벗기 시작했다. 스스로 대중의 삶 속으로 들어올 정도로 겸손해진 미술을 반갑게 만난 디자인은 원죄처럼 가슴에 품었던 속물성을 희석시킬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대미술은 덜 상업적인 디자인을 말하는 것이고 디자인은 보다 산업화된 미술이라고 이해했다. 이제는 디자인보다 훨씬 상업적인 미술도 등장했고 미술보다 미학적이고 조형적인 디자인도 많아졌다. 따라서 현대의 미술과 디자인은 별 차이점이 없다.

물론 현대미술과 디자인이 귀족성을 완전히 떨쳐버린 것은 아니다. 디자인은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릴 만큼 돈에 민감하다. 따라서 디자인은 여러 형태의 차별화가 존재하고 속성상 고급문화를 지향한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발견되는 디자인의 고급화 경향은 우리의 미의식을 자극하고 자부심을 갖게 해서 삶의 질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얼마 전 데미안 허스트의 ‘포름알데히드 수조 속 동물 시리즈’가 1470억 원에 팔렸다는 기사를 봤다. 예술 작품의 독창성이나 조형성을 논하기에 앞서 대중이 미술작품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런 천문학적인 액수의 작품이 일반에게 공개된다 해도 작품 앞에는 ‘가까이 오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붙을 것임은 자명하다.

옛날 덕수궁 잔디밭에 흉물스럽게 버티던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경고 팻말이 떠오른다. 발로 밟을 수 없는 잔디를 잔디라 할 수 없듯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작품은 현대미술이 아니다. 현대미술 작품이 재테크와 투자의 대상이 되어 다시 귀족화되어 가는 세상은 어지럽다. 현대미술의 민주주의 정신이 그립다.

박효신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교수·디자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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