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이태동]박경리 이청준을 뛰어넘으라

  • 입력 2008년 9월 13일 01시 53분


문화의 의미는 아우라(aura)처럼 느낄 수는 있으나 몇 마디 말로서 표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역사의 길 위에서의 인간 노역(勞役)이 승화된 결과이자 빛인 것만은 틀림없다. 식민지 시대인 19세기에 영국의 비평가 토머스 칼라일이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건국 60년을 맞아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우리나라는 결실의 가을이 되면 노벨 문학상에 대한 기대를 한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 우리 문학의 수준은 세계문학 수준에 아직 미치지 못한다. 우리의 신(新)문학 역사가 짧은 탓도 있겠지만 그것이 빈곤과 폐쇄성으로 점철되어 왔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우울했던 역사의 터널을 벗어난 지금 심각하게 대두되는 문제는 한국 문단에서 작가가 위대한 작품을 쓰는 대가(大家)로 성장하지 못하고 불꽃처럼 잠시 나타났다가 퇴장하는 조로(早老) 현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는 과거에 비해 많이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작가의 수명은 궁핍했던 시대보다 더 짧아지는 현상을 보인다. 현재까지 나타난 정황으로 보아 후배 작가들이 최근 작고한 박경리와 이청준의 문학적 업적을 뛰어넘기가 어려울 듯싶다.

물론 아직도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이 많고, 발표 지면은 더 확대됐다. 그러나 대부분은 독자의 관심을 얻지 못하고 잠시 얼굴을 보였다가 사라진다. 그 결과 권위 있는 문학상의 수상자와 후보자 대부분이 젊은 여성 작가인 경향이 있고, 창작에 일생을 걸고 늦게까지 지구촌 사람의 심금을 울릴 만한 위대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작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랫동안 노동이나 다름없는 글쓰기의 어려움을 이기고 반열에 오른 작가마저 역사 소설 쓰기에 매달리는 모습도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

왜 이 땅에서 이렇게 요절이 아닌 조로 현상이 일어날까. 첫째, 많은 젊은 작가가 등단할 당시 준비한 불꽃을 태우고 난 후에 부침하는 시대정신과 함께 급속하게 변하는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침몰하기 때문이다. 에드문트 후설이 말했듯이 절대적인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 능동적인 힘으로 자신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성숙한 변신을 이룩하지 못하면 죽은 자나 다름없다. 예술가는 타고난 재능을 갖고 있지만 상상력에 불을 붙이는 지적인 노력 없이는 더 훌륭한 예술적 성취를 거둘 수 없다. 오스카 와일드가 “예술은 모방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둘째, 기계문명의 발달로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인간 경험의 폭이 좁아지고 제한된 것이 또 하나의 원인이다. 셋째, 문화 권력의 정치화도 또 하나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그동안 우리 문단에는 유파를 달리하는, 자칭 엘리트라고 자부하는 문인이 특정 문예지를 중심으로 그룹을 형성해서 높은 벽을 쌓고 배타적으로 ‘문화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능력 있는 숨은 작가가 가능성을 꽃피우기 전에 스스로 문단을 떠나게 하는 ‘벽’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상부 구조는 하부 구조로부터 공급을 받지 못하면 결코 건강하게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개인의 재능 문제이든 혹은 사회 환경의 문제이든 많은 작가가 위대한 작품을 써서 남기는 큰 인물로 성장하지 못하고 아직 젊은 나이에 낡은 훈장만을 달고 왜소하고 초라한 문인으로서 일생을 마감하는 모습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가을의 국화꽃 향기와 같은 성숙한 예술과 문화 환경이 아쉽다.

이태동 문학평론가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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