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표정훈]창의력에도 필요한 주입식 교육

  • 입력 2008년 2월 10일 02시 52분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능력, 창의력은 도대체 또 무엇일까? 그것은 하늘 아래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들을 새롭게 연결짓고 다른 각도에서 궁리하며 새로운 쓰임새를 고안하는 능력일 것이다. 넘나들기, 가로지르기, 통섭, 학제적 사고 등의 말이 이러한 뜻의 창의력을 일컫는 다른 말들이라 하겠다.

이러한 창의력에 대한 중대한 오해가 있다. 창의력이라고 하면 기발한 생각과 같은 말이라 여기면서 주입식, 암기식 교육이 창의력 향상에 방해가 된다고 보는 오해다. 정치사회사상 분야에서 고도의 창의력을 발휘한 존 스튜어트 밀은 어려서부터 엄격한 조기 교육을 받았다. 불과 3세 때부터 그리스어를 배우고 10대가 되기 전에 라틴어를 익힌 것은 물론, 10대 초반에 경제학을 공부했을 정도다.

어른이 된 밀은 이러한 엄격한 교육 탓에 자신이 정서적으로 지나치게 조숙해버렸다는 점을 아쉬워하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탁월한 창의력을 발휘한 정치사회사상가를 얻었다. 20세기의 대표적 지성으로 손꼽히는 버트런드 러셀의 사례도 있다. 러셀은 초등학생 나이 때 할머니에게 영국헌정사를 배웠다. 헌정 사료를 읽고 할머니 앞에서 문답식으로 시험을 치르는 방식이었으니, 우리로 치자면 초등학생이 조선왕조실록을 철저히 공부한 셈이다.

여성 과학자의 상징으로 거론되는 마리 퀴리는 또 어떤가. 마리 퀴리는 남편과 함께 연구에 몰두했던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비가 새는 헛간에서 밤낮 없이 연구했다. 일 때문에 기진맥진했지만 우리는 꿈꿔 오던 대로 완전히 몰두했다.’ 과학적 창의력이라는 것도 길고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창의적 발견의 순간은 벼락처럼 내리는 축복이 아니라 인내의 시간 끝에 오는 당연한 결과에 가깝다. 게으른 창의력이란 잔꾀나 꼼수, 임시변통에 불과하다.

어디 과학만 그러하겠는가. 문학이나 미술 같은 예술 창작 활동에서도 빛나는 작품 뒤에는 무수히 쓰고 그렸다가 버린 습작 더미가 쌓여 있기 마련이다. 미국 최고의 인기 작가 스티븐 킹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이렇게 충고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슬쩍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많이 읽고 많이 쓰라는 말은 우리의 지상 명령이다.’

그렇다면 국가 차원에서 창의력에 관한 정책 비전 같은 게 있을까? 문화관광부가 2004년에 내놓은 소문난 잔치로 ‘창의 한국’ 로드맵이 있다. 그 이듬해 문화관광부는 같은 제목의 두툼한 책도 펴냈다. ‘창의 한국’을 위한 문화비전 27대 추진과제를 훑어보니 뷔페 상차림 같다. 멀리서 보면 맛있는 먹을거리가 가득한 것 같지만, 막상 앞에 다가서 음식을 살펴보면 그냥 지나치고 싶은 구색이다. 모든 것을 다 담으려다가 하나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꼴이라 할까, 창의 한국의 정책 비전이 창의적이지 못한 일종의 자가당착이라 할까.

개인 창의력의 기본이 부단한 노력과 인내와 암기와 온축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국가의 전체적인 창의 역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문만 그럴듯한 잔치판은 걷어치우고 기본에 충실할 때다. 그렇다면 무엇이 기본인가? 답은 현장에 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문화적 창의력을 꽃피우기 위해 묵묵히 갈고 닦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는 현장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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