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손혜원]나를 사로잡은 공공디자인

  • 입력 2008년 1월 26일 02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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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화두가 된 디자인은 산업과 예술이 어우러진 새로운 분야이다. 디자인은 미의 과학이며 기술과 예술이 조화된 실체로서 인간의 삶의 질에 기여한다. 디자인에는 여러 분야가 있으나 시각디자인 분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시각디자인은 시각에 호소하는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픽 디자인(graphic design)으로 더 일반화되어 있는 시각디자인은 ‘그래픽’이라는 용어가 말해 주듯 단순한 인쇄 복제를 전제로 시작됐지만, 현대에는 인간이 접하는 일체의 정보를 다루는 분야로 확대됐다. 시각디자인은 대중을 조종하고 교육하며, 설득하고 변화시킨다. 즉, 시각디자인은 ‘소통의 예술(communication art)’이다.

시각디자인 분야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언어’다. 시각디자인은 언어의 효율을 높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지속적으로 창조한다. 마케팅 책의 단골 메뉴인 ‘코카콜라’ ‘스타벅스’는 이 시대의 언어가 됐고, ‘참이슬’ ‘처음처럼’은 이미 우리나라의 대표적 아이콘이자 문화로 자리 잡았다.

시각디자이너는 ‘그림’ 또한 효율적인 소통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그림과 언어의 시너지 효과는 더 강한 커뮤니케이션 파워를 창출해 기업의 매출을 좌우하기도 하며, 월드컵의 붉은 티셔츠는 단숨에 대중을 이동시킨다. 좋은 디자인은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뿐 아니라 인간을 기쁘고 행복하게 만든다.

문화와 디자인의 관계는 긴밀하다. 라틴어 ‘cultura(경작하다)’에서 유래된 ‘culture(문화)’는 지속적인 학습으로 습득되고 전달된다. 교양과 지식, 세련되고 우아한 예술적 취향이 깃든 문화는 인간의 습관 중 가장 고매한 것이지만, 문화 수준은 소득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한 달 임금에 해당하는 입장료를 지불하고 뮤지컬을 즐기는 영국 노동자나, 낡은 턱시도지만 단정하게 갖춰 입은 초로의 신사가 구스타프 말러에 눈물 글썽이는 카네기홀의 경험이 아니어도, 문화가 부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디자인에 있어서도 투자한 경비와 품질이 반드시 정비례하지는 않는다.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디자인이 삶의 필연적인 선택이자 실천임을 깨닫고 행동하는 디자이너는 순리에 따른 ‘소통’을 중시한다. 이러한 디자인은 설득의 효율이 높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문화가 된다. 그러나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 ‘내용’이 무시되고 ‘형식’에 치중된 디자인은 심각한 공해가 될 수도 있다.

최근 우리 디자인계를 강타한 ‘공공디자인’ 열풍이 혹여 내용보다는 형식에 치중된 현상이 아닌지 우려된다. 물론 도시의 격조를 높이고 선진 문화에 걸맞은 아름다운 공공시설물도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세계적 대가들이 디자인한 도쿄 롯폰기힐스의 아름다운 벤치보다 뒷골목까지 완벽하게 정비된 일본의 간판들이 더 부럽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의 무절제한 간판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온전한 공공디자인을 기대할 수 없다. 물론 도시별로 간판 정비를 위한 여러 프로젝트가 발표되고 진행됐으나, 부자연스러운 형식에 억지로 짜 맞춘 결과물들은 더 절망적이다.

우리 간판의 문제는 정보의 내용이 간판의 형식을 지배한다는 본질적인 사실에 공감대를 이루어야 해결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심미적인 기초 위에서 효율적인 정보 전달 경험이 많은 시각디자이너들의 몫이다. 또한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고 ‘우리’를 생각하면서, 인간과 자연,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는 올바른 공공디자인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디자인 문화는 지속적인 학습과 노력으로 발전하며 전달된다는 것을 부디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손혜원 크로스포인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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