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남궁연]라디오는 오늘도 진화한다

  • 입력 2007년 6월 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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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시대는 끝났다”고들 말합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아내와 저는 부모님 눈치를 많이 봅니다. 5년 동안 열심히 라디오 일을 하고 있지만 TV에는 도무지 나오질 않으니,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클 것이라 걱정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라디오가 몰락이 아닌 부흥의 길을 걷고 있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전통적으로 라디오 하면 DJ와 아나운서 등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라디오는 첨단 정보기술(IT)을 최대한 활용해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미디어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라디오지만, 그저 과거와 똑같은 라디오로 머물러 있지 않은 겁니다.

휴대전화를 한번 보십시오. 전화기의 기능만 하고 있습니까? 우체국에 갈 필요가 없게 만드는 문자서비스 외에도 인터넷, TV 등 수많은 부가 기능이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휴대전화를 굳이 ‘전화 기능을 가미한 휴대용 컴퓨터’라고는 부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첨단기술을 덧붙인 라디오라도 그냥 그대로 ‘라디오’입니다. 다만 끝없이 진화하는 라디오입니다. 전통적인 ‘소리만의 라디오’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제 없어지고 있습니다. 200만 명이 넘는 청취자가 매일 인터넷으로 라디오를 ‘보면서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미디어 기술의 변화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디어를 움직이는 주체의 변화입니다. IT는 수많은 청취자와 진행자를 같은 시간에 같은 범주로 묶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라디오는 전통적인 일방적 미디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상호 교류를 위한 하나의 커뮤니티로 진보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 영화감독 데뷔를 앞둔 한 청취자에게서 “사전작업을 할 공간이 없어서 고통을 겪는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연을 소개한 후 일단 음악을 틀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에 올라온 청취자 의견을 재빨리 체크했습니다. 그 가운데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조언을 골라 소개한 후 “이 방송을 듣는 건물주 여러분! 딱 한 달만 무료로 쓸 수 있는 사무실을 좀 임대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방송을 듣고 있던 한 출판사 대표가 흔쾌히 책 창고를 개조해 임대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가정 형편 때문에 틀니를 못 하는 어머니가 걱정된다는 사연이 올라온 적도 있습니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갖가지 아이디어가 넘쳐 났습니다. 역시 그 의견들을 체크했습니다. 며칠 후 치과의사면서 가수 활동을 하고 있는 분을 게스트로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넌지시 운을 띄웠습니다. “틀니 때문에 고생하시는 어머님을 둔 청취자가 있는데, 혹시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현재 그 청취자 어머니는 틀니를 받을 기대에 부풀어 계신다고 합니다.

지난주엔 유전질환으로 시력을 잃어 가는 한 청취자의 작은 음악회가 열렸습니다. 그 청취자의 꿈은 기타 연주자입니다. 두 달 전 프로그램 게스트인 유명 기타리스트가 레슨을 알선하고, 한 청취자가 사용하던 기타와 앰프를 기증했습니다. 그동안 거친 훈련의 결실이 라디오를 통해 소개된 것입니다.

저는 라디오가 좋은 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요즘은 청취자의 삶 자체가 라디오의 주제이자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롱 테일’의 저자 크리스 앤더슨이 말한 미래사회를 지배할 롱 테일(긴 꼬리)은 바로 이렇게 미디어 소비자가 참여해 만들어낸 콘텐츠일 것입니다.

미디어의 미래를 앞장서서 보여 주고 있는 라디오는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실시간으로 들려오는 청취자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아 이에 대한 수많은 의견을 공유하면서, 전통적 미디어에서 소외됐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담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궁연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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