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신수정]‘왕의 남자’ 또다른 광대 이준익 감독

  • 입력 2006년 1월 19일 03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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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한 인터뷰에 따르면 영화 ‘왕의 남자’를 만든 이준익 감독은 대학 1학년 때 아이 아빠가 됐고 결혼을 했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그렇게 되었다. 그때부터 ‘우유 값을 벌기 위한’ 기나긴 전쟁이 시작됐다. 돈 때문에 자존심이 무너지는 경험도 했고 그 상처 탓에 세상에 복수하겠다는 일념도 다졌다. 물론 다른 감독들도 그런다. 그러나 모두가 스무 살에 애 아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그는 배고픔에 대해서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감독인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의 전작 ‘황산벌’에는 사투리로 재현된, 세상에 대한 걸쭉한 야유가 대단하다. 특히 나당연합군을 맞은 계백이 가족에게 칼을 겨누며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근엄하게 외칠 때, “한 나라를 지키는 장군이람서 가족은 왜 죽이냐. 호랭이는 가죽 땜시 죽고, 사럼은 이름 땜시 죽는거여”라며 절규하던 계백 아내의 말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충신과 열녀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한숨에 박살내 버리기 때문이다.

이 감독을 ‘악동’이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개봉한 지 한 달이 채 안 돼 관객 500만을 돌파하며 연일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왕의 남자’에서도 이 악동의 장난은 여전하다. 아니, 좀 더 원숙해졌다. 전작 ‘황산벌’의 코미디를 줄이고 정치 풍자의 급수를 높이며 권력에 대해 더욱 강도 높은 비판을 감행하고 있는 이 영화는 오늘 우리 장르 영화의 한 수준을 보여 준다고 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극중극 형식으로 삽입된 광대들의 놀음이 볼거리를 풍부하게 하고 촌철살인의 언어유희를 강화한다. 게다가 여자보다 더 예쁜 여장 남자 광대 ‘공길’을 둘러싼 왕 연산과 광대 장생의 삼각사랑도 있다. 다소 노골적으로 토로되던 ‘황산벌’의 풍자에 비해 극적 안정감을 취하고 있다고 할까. ‘왕의 남자’의 카타르시스는 단순한 폭로와 배설의 기쁨을 넘어 운명적 파국이 가져다주는 비극적 묘미까지 겸비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비극성은 광대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의 주인공 장생과 공길 등은 매번 목숨을 담보로 ‘논다’. 저잣거리에서 연산과 녹수의 행태를 과장하며 목숨을 연명하던 그들은 궁궐로 끌려와 최고 권력자인 왕 앞에서 다시 한번 그를 조롱하는 공연을 펼쳐 보여야만 한다. ‘천일야화’의 주인공 세헤라자드처럼 왕이 웃으면 살고, 웃지 않으면 죽는다. 조금이라도 잘못 놀면 죽는다. 그들의 ‘놀음’은 생사를 결정하는 내기에 가깝다. 그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어떻게 된 게 놀기만 놀면, 사람이 죽어나간다”. 연산이 이들의 놀이를 통해 자신의 사적인 복수를 단행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 영화는 광대란 죽음과 더불어 노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광대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들이 장학금 받고 대학 다닐 때 우유 값 걱정을 하며 산다는 것은 체제 바깥의 삶을 수락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체제 바깥은 허방이다. 자존심도 뭐도 용납되지 않는다. 상처만 가득할 수도 있다. 모두가 그 바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감독은 그 ‘허방’이 꼭 두렵기만 한 곳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왕의 남자’가 그것을 증명한다. 어쩌면 그것은 바깥에서만 이룰 수 있는 세계인지도 모른다. 장생과 공길처럼 줄 위에 섰을 때만 볼 수 있는 것들이 따로 있을 것이다. 줄 위에서 놀 수 있을 때 인생도 예술도 어떤 경지에 이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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