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칼럼]사과이후 행협개정 뒤따라야

  • 입력 2000년 7월 26일 18시 41분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1905년에 미국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러일전쟁을 마무리짓는 평화조약을 성사시키며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탁절(卓絶)한 이익’을 보장해 줌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지배를 뒷받침했고 여기에 힘입어 일본은 곧바로 대한제국을 강박해 ‘을사보호조약’을 맺게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일과 관련해 루스벨트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러일평화조약의 성립으로 동북아시아에 평화를 가져왔다고 심사위원들은 평가했던 것이다. 우리 민족으로서는 지금 생각해도 분통이 터져 기가 막힐 일이다. 심사위원들에게 코리아는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한국민은 그러나 미국을 대체로 감사의 마음으로 대해왔다. 포학했던 일제로부터 해방시켜주었고 대한민국의 건국을 도와주었으며 6·25전쟁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 복구를 맡아주었다는 사실 등은 대다수 한국민들의 머리에 미국을 ‘은인’의 나라로 각인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대미관(對美觀)은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비판적 지식인들, 그리고 8·15와 6·25의 기억을 지니지 않은 채 성장한 젊은이들 사이에서 미국은 유혈의 공범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인식이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대한민국의 건국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고, 6·25전쟁을 ‘북침’이나 ‘남침유도’ 또는 ‘민족해방전쟁’으로 보는 수정주의적 시각이 맹위를 떨치기도 했다. 달리 보면 8·15로부터 6·25까지의 5년 동안 남한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좌파적 역사인식이 재생한 셈이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시작된 공산주의 국가들의 소멸은 그러한 좌파적 조류에 대한 심각한 가격(加擊)이었다. 현실정치에서의 사회주의제도가 종말을 고하면서 미국은 이념전쟁에서의 승리자로 새롭게 떠올랐다. 그뿐만 아니라 소련이 해체된 상태에서 미국은 세계정치의 단독적 패권국가로 확실하게 자리잡았다. 여기서부터 미국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미국의 전설적 상원의원 고(故) 풀브라이트가 이미 1960년대에 경고한 ‘강대국의 오만’을 주저없이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 미군의 대표적 태평양기지들 가운데 하나인 오키나와의 일본인들이 반미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는 것은 그 한 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은 지난 10년 사이에만 해도 전통적 우방인 한국에서 ‘강대국의 오만’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그러나 대다수 한국사람들은 1980년대에 젊은이들 사이에 확산된 미국에 대한 비판의식 또는 반미적 태도의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고 여전히 친미적 시각을 유지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맞으면서는 혹시 이것이 반미 분위기를 ‘배은망덕’이라며 분노한 미국사람들의 보복적 음모의 결과가 아닌가 의심하면서 반성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 대해 ‘착한’ 한국에서 마침내 반미의식이 새롭게 성장하고 있다. 미국이 보여주는 ‘강대국의 오만’에 대한 비판 또는 분노가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 부분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 결정적 촉매는 한강에 독극물을 몰래 버리고도 은폐한 미8군의 처사였다. 미군에 의한 성폭행과 살인 등이 때때로 일어나는데도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 때문에 재판권을 주권국가답게 행사하지 못하는 데 대한 불만이 쌓이던 차에, 그리고 노근리의 진실과 매향리의 현장에 자극받던 차에 독극물사건이 알려지자 여론은 건전한 도시중산층에서조차 동요하게 된 것이다. 미군사령관이 비록 충분하지 않은 수준에서나마 사과의 성명을 발표한 것은 늦었으나 당연했다. 그러나 여론은 이 계제에 한미행정협정이 빠른 시일 안에 한국의 주권과 한국민의 자존심이 존중되는 방향으로 크게 고쳐지기를 요구하고 있다. 미군 범죄자에 대한 한국의 재판권 확보, 미군에 의한 환경파괴 방지 등이 확실하게 보장돼야겠다.

마침 27일은 휴전협정체결 47주년의 날이다. 휴전협정을 계기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맺어졌고, 이 조약에 의거해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게 됐다.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사회 일각에서는 주한미군의 감축론, 주한미군의 지위변경, 주한미군의 유엔평화군으로의 전환론 등이 토론되고 있다. 미국의 ‘강대국 오만’이 한국에서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된 문서라고 비판받는 행정협정의 개정에 미국 스스로 전향적으로 나와야 할 때다. 그렇지 않아서 한국사람들 사이에 ‘좌파적 시각에서의 반미론’이 확산된다면 그것은 두 나라의 우호유지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본사 편집논설고문·인천대총장>hak@donga.com

<고진하기자>jnk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