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칼럼]국회가 흔든 미국, 도둑이 흔든 한국

  • 입력 1999년 4월 23일 19시 38분


1940년대 말과 50년대 초 사이의 서너해 동안 미국은 국회의 극우적 의원들에 의해 뒤흔들렸다. 상원의 매카시 의원과 매커런 의원 같은 ‘반공 구세군’들이 “국제공산주의에 매수된 미국 정부안의 공직자들이 중국대륙을 중국공산당에 팔아넘겼고 한반도에 공산세력의 남침을 유도했다”고 공격하면서 수십명의 이름을 대자 온나라가 의혹과 격노에 빠졌던 것이다. 경찰 검찰 법원 언론도 몇몇 경우를 제외하곤 대체로 그 장단에 춤을 췄다.

가장 이성적 존재라는 대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이 중공을 승인하는 것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아니한가”라는 논제로 학생토론회를 주최했던 동부의 한 대학은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고, 그 대학의 재단이사는 ‘빨갱이’지도교수를 해임하라고 총장에 압력을 가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 바람에 애치슨 국무장관과 마셜 국무장관 같이 명성 높은 고위공직자들은곤욕을치르는것으로 끝났으나 그렇지 못했던 중하급 공무원들은 쫓겨나야 했다.

뒷날 매카시와 매커런 등의 ‘폭로’가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나서야 미국 사회는 비로소 냉정을 되찾아 자신들이 왜 ‘광란의 빨갱이 사냥’에 동조했던가를 반성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때 미국 사회가 깊이 병들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소련으로 대표되는 국제공산주의의 세계적 확산에 대한 위기감, 중국대륙을 ‘상실’했다는 좌절감, 한국전쟁에서 수많은 미국 병사들이 죽어가는데 대한 불만 등이 사회심리적 히스테리를 형성하게 되자 매카시즘이 위력을 발휘했다고 진단한 것이다. 그 뒤 미국 사회는 이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 다시는 ‘정신병자들’의 입에 의해 미국 사회가 중심을 잃은 채 뒤흔들려서는 안 되겠고, 그러려면 사회적 병리 현상이 줄어든 건전한 사회가 유지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열흘 넘게 한 절도범의 혀놀림에 온나라가 떠들썩하는 안타깝고 부끄러운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전과가 무려 12범에 마약 상습복용자인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언론매체의 집중적 관심을 받으면서 온 국민의 시선을 끌었고 여야의 논쟁을 불꽃튀게 만들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전과경력이 많은 범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말을 무시하자는 뜻은 아니다. 그의 말에 대해 경찰과 검찰은 편견없이 철저히 수사해 진상을 밝혀 세간의 의혹을 씻어주어야 한다. 수사에 은폐나 축소가 있어서는 용납될 수 없다. 그리고 공정한 수사로 부정이 드러나면 상응한 법적 제재를 당연히 가해야 하며 도덕적 책임도 마땅히 물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필자가 토론하고 싶은 것은 마약상습의 전과 12범에게 쉽게 기울어지게 만든 사회심리적 분위기이다. 거기서 권력자와 권력기관에 대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불신을 새삼스레 발견하게 된다. 고위공직자를 부정축재자로 보거나 심지어 ‘도둑’으로 보고 수사기관을 권력자의 방패막이나 하수인으로 보는, 그리하여 고위층이나 부유층을 터는 절도범을 ‘의적’처럼 여기는 체제저항적 기류와 냉소주의를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고 국민을 나무람하기 어렵다. 처음엔 완강히 부인되던 부정부패의 폭로가 뒷날 사실로 반전되어 왔던 일들, 경찰 검찰은 물론 법원조차 정권의 시녀노릇을 함으로써 특권층의 부정부패를 은폐 또는 축소시켜 왔던 일들이 절도범의 횡설수설에 가까운 진술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여야의 태도도 온당하지 못했다. 어느 쪽도 진상을 법에 따라 냉정하게 밝히려고 노력한다는 믿음을 주지 못했다. 여당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 가운데 뭔가 감추려는 듯한 인상을 국민이 받게끔 언동했고, 야당은 잘 걸려들었다는 식으로 앞뒤를 잘 따져보지 않은 채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몇몇 언론매체들 역시 선정주의에 가깝게 보도한 경향을 보였다.

미국 사회가 매카시 선풍을 겪은 뒤 그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았듯,우리 역시 이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겠다. 우선 정치인을 비롯한 공직자는 신뢰를 회복하도록 더욱 각별히 노력해야 하고, 여야 모두 냉정을 찾아야 한다. 경찰 검찰은 법에 따라 공평무사하게 수사하는 전통을 세워야 하며 언론 역시 이성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사회가 정상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국민은 공직자를 공직자로 믿고 도둑을 도둑으로 여길 것이다.

김학준(본사논설고문·인천대총장)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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