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송우혜]역사 앞에서 눈 가린 일본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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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혜 소설가
송우혜 소설가
이명박 대통령의 ‘일왕 사과 요구’ 발언으로 한일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일본은 발칵 뒤집혀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이 대통령은 사죄하고 발언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중의원은 “매우 무례한 발언으로 결단코 용인할 수 없으니 철회하라”는 결의문을 채택했으며, “죽음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무거운 말”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인까지 나왔다.

日, 패전 67년 지나도록 사죄 안해


이것은 실로 눈 크게 뜨고 지켜볼 만한 매우 흥미로운 풍경이다. 세계인들이 다 알다시피, 일본은 지난 세기에 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물론이고 미국까지 공격하는 해외 침략전쟁을 일으켜 많은 나라를 고통과 도탄에 빠뜨리면서 인류에 큰 죄를 지었다.

그 대가로 일본은 패전 이래 현재까지 전승국들의 주도에 의해 제정 공포된 ‘평화헌법’의 통제 아래 있다. 평화헌법은 전쟁 포기와 전력(戰力) 보유 금지를 명시하고 타국과 교전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일본의 침략성을 강력하게 억제하고 있다.

지난 세기에 일본이 감행한 그 죄악시된 해외 침략전쟁들은 모두 국가구조상 최고통치자였던 ‘천황(일왕)’의 이름으로 수행되었다. 전쟁에 관한 모든 명령은 ‘천황’의 이름으로 내려졌고, 일본 군인들은 전사할 때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 군벌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정략적으로 ‘천황숭배사상’을 깊이 주입하고 세뇌한 결과라고 하지만, 해외 침략전쟁 시기에 일본 국민은 진심으로 ‘일왕(천황)’을 일본의 최고통치자로 받들었다. ‘일왕(천황)’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에 전쟁을 더 계속할 수 없자 직접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여 전쟁을 끝냈다.

일본의 해외 침략과정에서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본 나라가 한국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아직까지 진정한 사죄를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이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한 것이다.

아무튼 이 대통령의 발언은 그 형식에서 ‘일왕’을 일본의 국가 최고지도자로 인정했다. 그런데 오히려 일본 측의 반응이 정반대여서 놀랍고 흥미롭다. “지난 세기 ‘일왕(천황)’의 이름으로 수행된 해외 침략행위의 책임자로 ‘일왕(천황)’을 거론하면 안 된다”고 막아서는 것은 곧 “지난 세기 일본이 해외 침략에 몰두할 당시 최고통치자였던 ‘일왕(천황)’은 허수아비거나 꼭두각시였고, 침략행위를 추진한 주체는 따로 있었다”는 주장이 되기 때문이다.

해외 침략전쟁 시기는 물론이고 1945년 8월의 패전 때에도 ‘일왕’은 일본의 최고통치자였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의 명목상 최고통치자이다. 그런데 패전으로부터 불과 67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일본인들이 ‘일왕’의 과거 위상과 통치행위를 부정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지금 한국의 이 대통령에 대해 ‘격노’하고 있는 노다 총리를 비롯한 일본 지도층의 행위는 겉으로는 ‘일왕’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보이는 듯하지만, 그 실질에 있어서는 엄청난 불경(不敬)에 해당한다. ‘일왕’의 존재를 ‘역사의 허수아비’로 만드는 방자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릇된 처신으로 세계인 존중 못받아


그런 일본인들보다는 ‘일왕 사과’를 요구한 한국의 이 대통령이 오히려 그의 존재와 역사적 위상을 실체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한 것이다. 일본 지도층이 이 대통령의 절반만큼이라도 ‘일왕’을 존중한다면, 결단코 지금처럼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설령 일본인들이 내심으로는 그를 존중하지만 다만 그가 ‘사과’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도록 방어하기 위해서 그런다 해도, 그 역시 큰 불경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일왕’을 큰 죄악을 저지르고도 결코 사죄하지 않는 ‘역사의 조무래기, 역사의 피라미’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안타깝다! 일본의 지도자들이여! 당신들이 역사 앞에서 이처럼 그릇되게 처신하기 때문에 일본은 세계인들에게 진정한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송우혜 소설가
#시론#송우혜#일왕사과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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